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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단단한 고요 / 김선우

by 혜강(惠江) 2020. 4. 25.

 

 

 

 

단단한 고요

 

 

- 김선우

 

 

 

마른 잎사귀 도토리 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2003) 수록

 

 

시어 풀이

 

*채머리 : ‘체머리의 북한어. 병적으로 저절로 머리가 흔들리는 병적 현상. 또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머리.
*타지다 : 꿰맨 데가 터지다.
*동당거리다 : 작은북, 장구, 가야금 따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잇따라 내다.

*찰지다 : 1. 반죽이나 밥, 떡 따위가 끈기가 많다. 2. 성질이 야무지고 까다
*엉기다 : 점성이 있는 액체나 가루 따위가 한 덩어리가 되면서 굳어지다.

*다갈빛 : 담갈(淡褐)의 잘못. 옅은 갈색빛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토리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심상을 이용하여 온갖 소리를 간직한 채 단단하게 굳은 도토리묵의 고요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는 우리가 흔히 무르고 연약하며, 밋밋한 것으로 인식되어 오던 도토리묵을 의인화하여 도토리 알이 도토리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하며, 도토리 알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소리의 이미지를 열거하여 시상을 전개하면서, 시상의 경과에 따른 대상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청각적 이미지 등을 통해 만들어진 개성적·창의적 인식은 독특한 시상 전개와 표현 방식과 함께 산문적 리듬과 끊어 읽기의 호흡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된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 준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는 완성된 도토리묵이 아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도토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묵이 되어 식혀지는 과정을 의인화된 표현과 청각적 이미지, 명사형 종결을 통해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인화된 도토리는 멍들고, 말리고, 껍질 타지고, 소곤대기도 하고, 서로 어루만지며, 작별 인사도 하고 다시 엉기고 핥아 주는 가련한 대상으로 의인화된다.

 

 그리고 2연에서는 1연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도토리묵이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의 한 행이 단독 연으로 제시하여 1연의 복잡한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마지막 3연에서는 1연에서 제시된 모든 소리가 묵의 단단함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결국 시끄러운 고요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시는 시적 대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하여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과정을 '~하는 소리'로 연결함으로써 각각의 과정이 지닌 이미지와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를 알맞은 호흡으로 끊어 읽으며 운율감을 느끼게 된다. 또 이 시의 다양한 의성어와 청각적 이미지는 먹을거리인 '도토리묵'을 미각이 아닌 청각으로 표현하면서도 대상이 지닌 이미지를 더욱 정교하게 전달한다. 또한, 명사형 종결의 반복과 열거, 도치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개성적 인식은 연약하고 무른 것이라는 '도토리묵'의 보편적 이미지를 '시끄럽고 단단한 것'이라는 개성적 인식으로 귀결시키고 있음을 할 수 있다.

 

작자 김선우(金宣佑, 1970 ~ )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계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힘동인으로 활동. 주로 여성과 생명에 대한 공감과 관심을 표현한 작품들을 써왔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 아무것도 안 하는 날(201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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