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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by 혜강(惠江) 2020. 4. 25.





지상의 방 한 칸

- 박영한 님의 제()를 빌려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은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 밤에 쓰는 편지(1987) 수록

 

 

시어 풀이

*애린 : 상처가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픈. ‘아린의 전라도식 방언

*망망천지(茫茫天地) : 넓고 먼 천지

*사정없고 : 남의 사정을 헤아려 돌봄이 없이 매몰차고.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가난한 삶의 현실 때문에 힘겨워하는 시인의 처지를 노래한 시로, 가난으로 인한 가장의 회한과 비애를 형상화하고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시적 화자의 고뇌를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처자식이 있는 가난한 시인으로, 마감에 쫓겨 원고지를 채우는 처지에 비애를 느끼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심정을 비탄적이며, 자기 고백적인 어조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원고지 칸방 한 칸의 대립적인 소재를 통해 화자의 비극적 현실을 부각하는 동시에 설의적 표현을 사용하여 화자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초반부터 화자는 견디기 힘든 현실 앞에서 잠이 오지 않아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고 토로한다. 몸부림치다 둘째 놈 어린 손끝이 몸에 닿자 아프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여러 식구가 모여서 잠을 자고 있으니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홀로 깨어 평화롭게 자고 있는 자식들을 쳐다보는 애비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플만큼 마음이 몹시 무겁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나를 애비로 믿고 자는 아이들의 얼굴은 평화스럽기만 하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중압감이 몰려오는 화자는 측은한 마음에 바로 누이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라는 대목에서 시적 화자인 애비의 직업이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애비는 원고 청탁이 들어오는 대로 열심히 원고지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하다. 이는 원고 마감 시간에 쫓기지만 근심과 걱정으로 일이 진척되지 않아 불덩이처럼 달아오르자 이 넓디 넓은 세상에서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고 울부짓듯 하소연한다. 이것은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자책과 가나으로 인한 비애를 설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초라한 방 한 칸은 위의 넓은 원고지 칸과 대립되면서 화자의 비극적 현실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방 한 칸 없는 삶에 대한 비탄에 잠긴 남편은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보며 아내에게 미안함을 나타낸다.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이란 표현으로 보아 며칠 후에는 세들어 사는 이 방 한 칸마저 내놓고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인가 보다. ‘밖에는 바람 소리사정없는데 잠이 올 리가 없다. 남의 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식구들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실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이다. 어떤 미학적 수사나 기교가 없어 오히려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시인 특유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그려낸 애틋한 서정의 여운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이 시에는 박영한 님의 제()를 빌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소설가 박영한(1947~2006)은 도농 접경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해학적이고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내 한국 세태소설의 한 계보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가 쓴 지상의 방 한 칸(1988)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도시 변방 뿌리 없는 군상들의 고단한 삶을 애절하게 그린 소설로서, 연암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그는 신촌 방에 종일 틀어박혀 작가는 써대고 아내는 그걸 받아 톡톡 타자를 쳐서 부지런히 원고지를 메웠다. 그들을 수상히 여긴 주인집 중학생 아들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간첩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상의 방 한 칸>은 맘 편히 글 쓸 수 있는 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 변두리를 떠돌며 셋방을 전전해야 했던 작가 자신의 체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그래서 박영한 소설가의 <지상의 방 한 칸>의 제목을 빌려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기며 살아가는 힘겨운 삶을 시로 형상화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 소설과 시가 밮표된 80년대는 시기는 부동산투기 광풍이 몰아치던 때였다. 당시 어렵게 사는 이들의 꿈은 내 집 장만이고 대문 옆에다 자기 이름의 문패를 대못으로 쾅쾅 박는 것이었다. 남자가 가장 비참할 때가 아이들 먹고 싶은 것 주머니가 비어 사주지 못할 때와 주인집 눈치 보느라 제 자식들 맘껏 뛰어놀게 하지 못하고 동선을 단속할 때였다. 행여 주인집 아이가 심술을 부려 애들끼리 싸움이라도 하면 눈물을 삼키며 제 자식을 야단치고 돌아서서 울었다. 이 시는 그런 시대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해설 : 시인 남상학)

 

 

작자 김사인(金思寅, 1956 ~ )

 

 시인. 축북 보은 출생. 1982시와 경제동인.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김사인은 대학신문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1976), 밤 지내기(1976) 등의 시를 발표했고, 1977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74학번 동기들과 함께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후 민중문학 진영에서 활동하며, 첫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1987)을 펴냈으며, 그 후기(後記)심약과 우유부단함노동과 사랑이라는 자신의 성격과 시의 지향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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