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 시집 《동두천》(1979) 수록
◎시어 풀이
*역두(驛頭) : 역전(驛前).
*저탄(貯炭) : 숯이나 석탄을 저장함. 또는 그 숯이나 석탄.
*신기루 : ① 온도나 습도의 관계로 대기의 밀도가 층층이 달라져, 광선의 굴절로 인하여 엉뚱한 곳에 어떤 사물의 모습이 나타나는 현상. ② 공중누각.
*서걱여 : ‘서걱거려’의 방언. 무엇이 스치거나 밟히는 소리가 잇따라 나.
*진창길 : 땅이 질어서 질퍽질퍽한 길
이 시는 시인이 ‘동두천’이라는 지역에서 교단에 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아픈 역사의 극복과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노해하고 있다.
2연에서는 기차가 떠난 기차역에서의 화자는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혼혈 아이들의 소식을 궁금해 한다. ‘눈’의 깨끗함과 암울한 현실을 상징하는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의 더러움이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하얀 눈과 검은 저탄 더미가 시각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그러나 ‘눈’면서 ‘내리는 동안만 깨끗한 눈’일 뿐, 떨어져 녹는 순간 석탄과 구분되지 않고 ‘몸을 버리게 된다’라는 자연현상은 곧,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혼혈아의 운명과 비유된다. 이런 현상이 동두천 혼혈아의 태생적 운명을 상징하는 것은 절묘하면서도 뛰어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연에서는 동두천 시절의 삶에 대한 설움과 순수한 삶에의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동두천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 땅의 모순을 화자는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며 자조적인 한탄한다. ‘눈물’은 중의적 표현으로 눈이 녹은 물이면서, 시인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며, ‘캄캄한 어둠’은 암울한 현실의 상황이다. 이렇듯화자는 동두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좌절하면서도 그것을 연민으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화자는 ‘더러운 그리움’이라는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시어인 ‘그리움’은 인간적이고 순수한 삶에 대한 희망을 ‘더럽다’는 것은 그 희망이 우리를 늘 배반했다는 뜻이다. 화자는 ‘동두천’이라는 곳을 추하고 더러운 공간이지만 이곳에서의 우리 이웃들의 아픈 삶을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4연에는 이 시의 주제연으로, 순수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화자에게 동두천은 덜미에 ‘끼얹는 바람’처럼 시련의 삶이었고, ‘첩첩수렁’의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며, 그래서 마음이 굽혀지고, 몸도 병들어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이라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는 동두천에 대한 연민을 안고 이 진창길을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 올 새벽’을 향하여 건너야 한다고 노래한다. 이것은 ‘새벽’으로 상징되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삶이 있는 곳을 지향하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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