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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밑그림 / 김명수

by 혜강(惠江) 2020. 4. 24.

 

 

 

 

 

밑그림

 

- 김명수

 

 

봉천동 산허리

슬레이트 집에

남편은 집 짓는 데 막일을 갔다 오고

아내는 난전에서 푸새를 팔았다

늦저녁을 지어 먹고

단칸방에 앉아

아내는 불빛 아래 양말을 기우고

남편은 꽁초를 피워 물었다.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가지요

서울 온 지 벌써 십오 년이니

흐린 눈 가누어 실파람 꿰며

아내가 혼잣말로 말문을 열자

남편이 말없이 턱수염을 비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갔구나

봉천동 산허리 슬레이트 집 자리에

거대한 재개발 아파트가 들어섰다

여기 살던 가족들 어디로 갔나

그 소식 아는 자 아무도 없고

재개발 아파트 낙성식 자리

둥그런 애드벌룬 높이 떴는데

서울 하늘은 황사로 흐려 있다  

 

- 시집 하급반 교과서(1983) 수록

  

 

시어 풀이

 

*밑그림 : 시험적으로 대강 초 잡아 그린 그림. 원화(原畫)

*난전(亂廛) : 허가 없이 길에 임시로 벌여 놓은 가게.

*푸새 : 산과 들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

*실파람 : ’실바람의 잘못 쓰인 말, 가는 실(細谷), 잣실(栢谷).

*낙성식(落成式) : 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가난한 삶을 영위하는 부부의 삶과 나날이 발전해가는 도시의 풍경을 대비적으로 묘사하여 도시 빈민의 힘겨운 삶과 개발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낙후된 지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외 계층의 삶의 모습을 자세하게 서술하여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고, 후반부에서는 개발의 비정함에 대한 분노와 함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배경묘사로 끝맺음하여 시적 여운을 남기고 있다.

  모두 2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1연은 상경 후 15년 동안 서울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 ‘봉천동 산허리에 지어진 슬레이트집에 부부가 살고 있다. 남편은 집 짓는 막일을 하고, 아내는 난전(亂廛)’에서 채소 파는 일을 한다. 늦은 저녁을 지어 먹고 아내는 단칸방에서 불빛 아래 양말을 깁고, 남편은 꽁초를 물었다. 아내가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간다면서 서울 온 지가 벌써 십오 년이 지났다고 말문을 열자 남편은 말없이 턱수염을 비빌 뿐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고생한 만큼 넉넉하지 못한 모양새가 우울하기 그지없다.

 

 2연에서는 다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슬레이트집을 대신해 거대한 재개발 아파트가 들어서서 삶의 터전을 잃은 모습을 그린다. ‘재개발 아파트1연의 슬레이트 집과 대조되는 것으로 개발로 인하여 달라진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 살던 가족들 어디로 갔나라는 화자의 질문은 그 소식 아는 자 아무도 없고라는 말에 대응하면서 재개발로 인해 밑그림을 이루며 살던 슬레이트 집에 살던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게 된 역설적인 상황을 그려낸다. 마지막 재개발 아파트의 낙성식자리에 이를 알리는 둥그런 애드벌룬만이 높이 떠 있고, 서울 하늘은 황사로 그려져 있다. 이 배경 묘사는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이들의 애환을 상징하면서 시 전체에 우울한 분위기를 드리우고 있다.



  이 시는 문명의 발전 속에서 비정하게 소외되어 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밑그림을 그리듯 소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전국 각 곳에서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계속 진행중이다.

 

 

작자 김명수(金明秀, 1945 ~ )

 

 

 시인, 경북 안동 출생.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수학했다. 1977서울신문신춘문예에 시 <월식>, <세우>, <무지개> 등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76년 김창완, 권지숙, 정호승, 이종욱, 하종오, 김명인 등이 주도한 반시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시적 대상을 이루는 당대의 어두운 현실을 시인의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꿰뚫어 봄으로써 그 의미와 실체를 또렷하게 부각시켰다.


  시집으로 월식(1980), 하급반 교과서(1983), 피뢰침과 심장(1986), 침엽수 지대(1991), 보석에게(1996), 아기는 성이 없고(2000), 가오리의 심해(2004), 여백(2009), 곡옥(2013) 등을 간행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아동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창작동화집 해바라기 피는 계절등 많은 동화집을 냈다. 그리고, 시비평집 시대상황과 시의 논리》』(2013)가 있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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