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을숙도 :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속하는 섬. 낙동강 하류의 철새 도래지.
횡대 : 가로로 줄을 지어 늘어선 대형.
깔쭉대면서 : 쓸데없는 말을 밉살스럽게 지껄이면서.
이 시는 영화 상영 전 애국가를 들을 때 화면에 비치는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과 달리 현실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비하여, 암울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좌절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으로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이 시는 1980년대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 의무적으로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화면 속에 나오는 새 떼의 비상을 보며, 자신도 이 상황으로부터 떠나고 싶지만 결국 떠날 수 없음을 자각하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현실에 대한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1~2행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에서, 관람석의 불이 모두 꺼진 캄캄한 영화관은 암울한 현실 상황을 표상한다. 3~10행에서는 세상을 드는 새들의 비상을 노래하고 있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의 ‘삼천리 화려 강산’은 애국가의 한 소절로서 악압과 구속이 있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그런 현실은 화려 강산일 수 없다는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이다. 따라서 ‘삼천리 화려 강산’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관객들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삶을 따라야 했던 당시의 민중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한 사람인 화자의 눈에는 ‘을숙도’ 갈대숲 위로 날아오르는 ’흰 새 떼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영상에는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영상도 있었는데 이 시에 나오는 '새 떼'는 그 철새들이다.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나 ’낄낄대면서‘등의 음성상징어는 모두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표현이며, ’일렬 이열 삼렬 횡대‘는 군사 문화적 속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는 ‘삼천리 화려 강산’을 떠나 줄지어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영화관의 화면의 새 떼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11~20행은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떼들과 대조적인 상황을 통해 화자의 절망과 좌절감을 강조하고 있다. 화자는 새떼들을 보며 ‘우리도 우리들끼리’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망도 잠시일 뿐, ‘대한 사람 대한으로/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의 끝 구절이 나오자 사람들은 서둘러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화자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주저앉는다’라는 것은 국민 통제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화자의 좌절감을 표현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과 좌절감을 냉소적 어조, 반어적 표현을 통해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이 시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는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군사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 속에서 갈등과 정치적 억압을 겪어야 하는 시기였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획일화되었고, 극장에 가서는 애국가를 경청해야 하는 등 조국애를 강요받았다. 이 시는 이러한 암울하고 억압적인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조국. 억압적인 현실 상황을 반어적 표현으로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획일화를 강요하는 문화를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표현한 것이 이것을 입증한다. 이런 현실 상황에서 이 시는 조국애를 강요받았던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절망감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 본명 황재우.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 《문학과 지성》에 수필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섬세한 감각, 아름다운 서정과 시대에 대한 분노가 교묘하게 결합한 시를 주로 썼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대와 분리될 수 없는 그의 시에는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시적 파괴의 형태로 융화되어 있으며 시인은 시적 화자의 자기부정을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4), 《나는 너다》(1987), 《소용돌이무늬 속의 연꽃》(1990), 《게눈 속의 연꽃》(199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백석문학상 수상작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가 있다. 시작 활동뿐만 아니라 극작 및 미술평론에서도 능력을 보였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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