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서(書)
- 유 치 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리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熱烈)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原始)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동아일보》(1938)
<시어 풀이>
회의(懷疑) : 확실성을 의심하는 정신 상태.
애증(愛憎) :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백일(白日) : 구름이 끼지 않아 밝게 빛나는 해. 대낮
작열 : 불 따위가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름.
영겁(永劫) : 한없이 오랜 세월. 영원한 세월.
허적(虛寂) : ‘허적하다(텅 비어 적적하다)는 어근
열사(熱沙) : 뜨거운 사막.
사구(砂丘) : 모래 언덕.
회한(悔恨) : 뉘우치고 한탄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아라비아 사막’이라는 극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속에서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결연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유치환의 시는 관념적인 문제를 엄숙하고 웅장한 남성적 독백 조로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작품 또한 그런 계열의 대표적인 시이다. 3연으로 된 이 작품은 1연에서 생명과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하였고, 2연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는 극한적 공간 표현, 3연에 와서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의 지식이나 감정으로는 생명의 본질을 깨우칠 수 없음을 알고서 ‘병든 나무’처럼 부대끼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생명 본연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를 품고, 애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허무와 회의감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좌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고,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기 위하여 극한 상황으로 설정한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떠나게 된다.
2연에서는 아라비아 사막은 이글거리는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고 ‘알라의 신’만이 존재하는 ‘영겁의 허적’의 절대적 공간이며, ‘일체’가 사라져 버린 죽음의 공간이다, 그곳은 모든 존재를 무력화시키는 공간으로써 시련의 극이며, 절대의 절망과 고독의 혹독한 공간이다. 절대 고통의 공간으로 가자는 내밀한 결의와 비장함이 엿보인다.
3연에 와서, 화자는 바로 이러한 역설적 공간으로서의 아라비아 사막에서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열렬한 고독'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의 세계에 자신을 바치겠노라는 비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 참된 '나'란 세속에 물든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넘어서, 성취하고자 하는 '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으로서의 자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두 번의 ‘나’가 나오는데 하나는 ‘현상적 자아’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 자아’ 또는 ‘생명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에서의 의미나 가치, 또는 생명의 본질을 찾지 못했을 때, 이 현실 공간을 떠나 더 가열(苛烈)한 절망 속으로 가자는 것은, 자기를 부수어 버리겠다는 자포자기가 결코 아니다. 더 큰 시련으로 영육(靈肉)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자기희생을 통한 득도(得道)가 가능해진다는 논리이다. 결국, 이 시는 고민, 좌절, 절망의 끝에서 허무 의식을 떨치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를 노래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작자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시인. 경남 통영 출생. 호는 청마(靑馬). 《문예월간》(1931)에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생명에 대한 열정을 강렬한 어조로 노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적인 의지도 보였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시집에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보병과 더불어》(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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