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愛隣)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삼천리》(1941)
애련(愛憐): 가엾이 여겨 따뜻한 정을 베풂.
비정(非情) : 인간다운 감정을 가지지 않음.
함묵(緘默) :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함.
원뢰(遠雷) : 멀리서 울려 퍼지는 천둥 소리.
이 시는 자연물인 바위를 소재로 하여 현실 초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태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는 ‘바위’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단호하고 의지적인 남성적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1행에서 화자는 ‘바위’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바위’는 감정이나 외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서 강인한 정신과 의지의 표상이자, 화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역설법으로 이상 세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강조한다.
2~3행에서 바위는 애련 즉 사랑과 연민 등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희로, 즉 기쁨과 노여움에도 움직이지 않겠다 한다. 4~6행에서는 이런 의지를 ’억년 비정의 함묵’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오직 내면적 성찰과 단련(내적 수련)에만 몰두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7~9행에서는 ’구름’과 ’원뢰’로 표현되는 외부의 자극이나 유혹 등의 가변적 대상을 멀리한 채, 10~12행에 와서는 자신이 꿈꾸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현실적 좌절에도 고통을 토로하지 않는, 즉 인간적인 감정과 외부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극적인 삶을 소망하고 있다. 마지막 행에 와서 화자는 1행의 ’바위가 되리라‘라는 거듭된 말로 바위와 같은 삶에 대한 소망을 반복하면서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즉, 처음과 마지막 행을 유사한 구조로 배열함으로써 초극적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유치환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문학사에서 ‘허무와 의지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유치환이 추구하는 허무는 현실적인 삶에서 인간이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 즉 감정이나 생명에 대한 집착과 구속 같은 것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시의 ‘바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비정(非情)의 함묵(緘默)’과 ‘생명의 망각’은 그러한 경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허무’는 모든 것을 덧없다고 보는 허망함이 아니라 그 바탕에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깔고 있는 허무이다. 즉, 그는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은 것이다. 결국, 그에게 허무 의식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현실 초극적인 삶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시집에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보병과 더불어》(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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