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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추일 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by 혜강(惠江) 2020. 2. 25.

 

 

 

 

추일 서정(秋日抒情)

 

 

김 광 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인문평론(1940)

 

 

<시어 풀이>

 

포화(砲火) : 총포를 쏠 때 일어나는 불.
일광(日光) : 햇빛.
근골(筋骨) : 근육과 뼈대. 여기서는 포플러 나무의 가지

철책(鐵柵) : 쇠로 만든 울타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가을을 소재로 하여 현대인의 고달픈 눈에 비친 가을의 고독과 애수를 회화적 수법으로 그려낸 시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특성을 잘 살려 이국적이고 도회적인 시어와 기계적, 물질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가을날의 황량한 풍경을 도시 문명에서 그려낸 것이 특색이다. 은유와 직유 등의 비유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시각적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면서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갔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행까지는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이 다양한 비유로 제시되어 있다. ‘망명 정부의 지폐와 같은 쓸쓸한 낙엽, ‘풀어진 넥타이처럼풀어진 초라하고 구불구불한 길, ‘담배 연기와 같이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급행열차, 그리고 포플라 나무, 공장, 철책 등 비유로 채택된 소재를 통해 가을날의 황량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감정보다는 이성이나 지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지적인 성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12행부터 마지막 행까지는 앞부분에서 묘사된 황량한 도시에서 느끼는 고독감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공연히 풀벌레 소리 들리는 풀섶을 발로 차 보기도 하고, 공중에 돌팔매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돌팔매 행위는 도시 문명의 황량함과 각박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는 표현으로 볼 때 화자는 황량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욱한 풀벌레 소리는 청각적 이미지 풀벌레 소리를 시각적 심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표현이다.

 

 결국, 이 작품 속의 여러 이미지는 소멸과 조락, 도시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서구적 이미지로 이 시의 주제인 도시의 가을 풍경에서 느껴지는 황량함과 고독감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작자인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1930년대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그중에서도 이미지즘 시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도시 문명적 소재를 시각적으로 새롭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하여 감각적 묘사에도 뛰어난 성과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김광균은 관념적이거나 정서적인 내용마저 회화적으로 그려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다. 김광균은 이러한 묘사와 함께 도시인이 느끼는 허무감이나 고독감 등을 아울러 드러내고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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