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오월
- 노 천 명
청자(靑瓷) 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앞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씬
향수보다도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에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남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 《창변(窓邊)》 (1945) 수록
▲이해와 감상
전원적, 향토적, 회상적인 이 시는 푸른 오월을 제재로 하여 갈등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희망에 찬 어조로 오월의 아름다운 정취(情趣)와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래서 미래향적이다.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인 이미지의 표현이 많아 오월의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이 작품은 “고독과 향수(鄕愁)의 시인”이라 불리는 노천명 특유의 작품이면서도 감상에 젖어 과거 지향적인 세계에만 빠져 있지 않고 이 시 끝부분에 과거의 향수를 떨쳐 버리고 미래 지향적인 희망의 세계로 비상(飛翔)하고자 하는 특이성을 보여 주고 있다.
1연은 5월에 대한 계절감이 한 폭의 풍경화와 같은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위로 ‘청자 빛 하늘’, 아래로 ‘연못 창포잎’ 등 청색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싱싱하고 생동하는 5월의 정취를 채색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육모정 탑’, ‘연못 창포잎’, ‘여인네 맵시’ 등은 우리 고유의 향토적인 정감을 드러내고 있는 표현들이다.
2연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5월의 계절감이 화사(華奢)한 서양적 이미지로 그려져, 제1연의 한국적인 향토적 표현과는 대조를 이룬다.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는 시적 자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생각이 5월의 계절감에 사풋이 깃들임을 말한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女神)’은 원관념인 ‘오월’을 보조관념인 ‘계절의 여왕’과 ‘푸른 여신(女神)’으로 표현한 이중 구조로 된 복합 은유이다.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라는 영탄은 아름답고 화려한 계절을 맞이하여 상대적으로 시적 자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느껴졌다는 뜻이 된다.
3연은 화자가 고독하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몰려드는 향수를 제어하지 못하고 잠시 옛날의 회상으로 잠겨가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4연~6연으로 이어지면서 “돌담길을 끼고 외딴길을 걸으며 걸으며” 과거의 회상에 잠겨 무지개가 피듯 추억의 실마리를 계속 따라간다. ‘풀 냄새’, ‘청머루 순’, ‘꿩 우는 소리’, 갖가지 나물을 뜯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립다. 지금은 소식을 모르는 과거 추억 속의 사람을 불러 본다. “나의 사람아”라고. 후각, 시각, 청각적인 이미지가 서로 결합되어 한가롭고 평화로운 5월의 전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라는 표현은 두 생각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찬 미래로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어 있을 것인가. 착잡한 심정이다. 그러다가 화자는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라고 표현한다. 시적 자아가 선택한 방향은 지향적이다. 종달새가 하늘로 힘차게 비상(飛翔)하듯 화자의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약동하는 오월을 맞아 화자는 희망에 찬 심정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연에 와서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는 시적 자아가 초라한 현실과 고독을 떨쳐 버리고 희망과 기쁨에 가득찬 심정을 영탄법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각오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주로 ‘향수’와 ‘고독’의 과거 지향적인 시를 쓰던 시인이 미래 지향적인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시인의 내면적인 변화라기보다는 밝은 이미지인 아름답고 화려한 계절인 5월이 시인에게 준 감동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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