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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사슴 / 노천명

by 혜강(惠江) 2020. 2. 18.




사슴

 

                                     - 노 천 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시집 산호림(1938) 수록

 

 

이해와 감상


   28행으로 된 이 시는 찰막하다. 노천명 시인의 대표작인 <사슴>은 현실에 타협하지 못한 고독과 빈궁으로 일생을 마친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현실에 적응하거나 타협하지 못하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노래한 작품이다.

 

 1연에서 시인은 사슴의 외모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으로 규정하고 있다. 젊잖고말이 없고, 관이 향기로워 무척 높은 족속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슴의 외모는 그가 관찰한 사슴의 모습이며 사슴을 통해 바라본 자신의 모습, 즉 귀족적 풍모이기도 하다. 우선 모가지가 길다는 것은 바라보는 사시적인 시야가 길어 그리움이 깊다는 뜻일 것이고 따라서 그의 이상이 높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다른 동물과는 다른, 구별된 풍모를 지닌 존재인 것은 맡다. 그래서 이런 남다른 인식은 특별한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와는 쉽게 어울릴 수 없는 나름의 소외감과 슬픔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런 사슴의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2연에서는 슬픈 사슴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부분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는 사슴이 자신 안에 갇혀 있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자신에 대해 성찰의 매개물이 된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어보는 사슴은 전에 자신이 가졌던 전설 같은 꿈, 사랑, 희망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일 뿐이다. 결국 지금 이 현실 속에는 슬픈 모가지의 사슴, 즉 자신의 본 모습만이 남아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젖어 쉽게 다다르지 못할 거리의 먼데 높은 산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다. 여기까지 이르면 모가지가 긴 사슴의 슬픔은 배가(倍加)된다.


  결국 '사슴'에 감정이입된 시인은 현실 속에서 고고한 높은 족속으로 자처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으로서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그의 인생 역정이 떠올라 더욱 안타까운 느낌이다. (남상학)

 

 

작자 노천명(盧天命, 1912~1957)

 

  황해도 장연 출생. 본명은 노기선(盧基善).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2밤의 찬미를 발표하고 1935시원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대표작인 사슴이 실려 있는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을 펴냈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체호프의 앵화원에 출연했고 여성의 편집을 맡기도 했으며 1943년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다. 1945년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펴냈는데 산호림과 마찬가지로 고독·애수·향수가 짙은 시를 실었다. 그러나 그중에 향토적인 소재의 시가 보여주는 건강함과 소박함은 고독을 노래한 시와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을 발표하여 그의 생애에 첫 번째 오점을 남겼다. 친일시인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방 후에는 서울신문부녀신보등에서 일했으며,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인 모윤숙과는 달리 우파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그 후에도 북한을 찬양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감옥생활을 했다. 뒤에 여러 문인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으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의 생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긴 셈이 되었다. 그 가운데 펴낸 시집이 별을 쳐다보며(1953)인데, 이 시집에 수록된 40편 가운데 21편이 옥중시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는 현실에 대한 혐오감과 심한 고독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사포', '사슴의 시인', '물의 시인', '고독의 시인', '자제의 시인', '향수의 시인'이란 찬사를 받았던 여류시의 선구자라로 불리던 그는 일제 말의 친일과 6 25전쟁 중 부역의 혐의로 수난을 겪으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4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1958년 유작시집으로 사슴의 노래가 있고, 수필집으로 산딸기(194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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