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파초(芭蕉) / 김동명

by 혜강(惠江) 2020. 2. 15.


<사진 : 강릉 김동명문학관에 선 파초>




파초(芭蕉)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렬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조광(朝光) 19361월호

 


이해와 감상

 

 1930년대 중엽에 나온 김동명, 김상용, 신석정의 시를 한국시사에서 전원시파,’목가적파라부른다. 이들의 시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면서, 자연과 인간의 친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자세를 현실 도피적이라 비판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들의 시에서 일제 강점기 현실에 대한 저항 정신이 깔려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시 <파초>에서 김동명 시인은 조국을 잃고 방랑하는 망국(亡國)의 한을 따듯한 남국을 떠나 추운 이국땅에서 떨고 있는 파초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하고 서로 도움을 주는 심정으로 파초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방법이나 굳은 의지는 없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과 조국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이 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김동명 시인이 노래하는 시의 주제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파초는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나는 관상용 다년생 식물로 이 시에서는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로 쓰이고 있다. 시인은 따스한 남국을 떠나와 추운 곳에서 가련하게 살아가는 파초의 운명을, 자유를 잃고 조국을 떠나 살면서 항상 조국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처지와 동일하게 제시하고 있다.

 

 먼저 1연에서는 조국을 떠난 파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따스한 남국을 떠나와 살아야 하는 파초의 '가련한' 처지에서 화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파초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2연에서는 이국땅에서 남국을 향해 향수를 불태우는 파초를 ''라고 의인화시켜 외로움을 표출하고 있으며, 3연에서는 파초의 모습을 '소나기를 그리는 정열의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화자는 그런 파초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샘물을 길어 그의 발등에 붓는다. 그리고 4연에서는 밤이 깊어 날씨가 차가워질 것을 걱정한 화자가 파초를 자신의 방에 들여놓겠다고 한다. 마지막 5연에서는 화자가 즐거이 파초의 ''이 되어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은 파초와 화자의 처지가 동일하다는 일체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4연의 ''5연의 '겨울'은 모두 화자와 파초가 겪는 시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련을 함께 나누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일체감이 된 그들은 결국 ''''의 개별적 존재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 운명체임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치맛자락'으로 서로를 '가리워' 주고, 암담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미지는 ‘(1~5)‘(6~9)우리‘(10)으로 전개된다.

 

 다시 말해, 파초에게서 느꼈던 동정심이 상호 교감(相互交感)의 과정을 거쳐 애정으로 심화됨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일체화된 것이다. 여기서 치맛자락'이란 파초의 넓은 잎사귀를 뜻할 뿐 아니라, 성숙한 여인의 애정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제의 모진 탄압을 상징하는 우리의 '겨울'을 막아주는 보호막이자 도피처가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조국 광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작자 김동명(金東鳴, 1900~1968)

 

 호는 초허(超虛). 강원 명주 출생, 어린 시절 함흥으로 이사하여 영생중학교를 마친 뒤 1925년에 일본에 유학을 가 낮에는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과를, 밤에는 니혼대학[日本大學] 철학과를 수학, 졸업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흥남 동광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흥남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흥남학생의거사건(1946)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을,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1960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직하고 참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1923개벽당신이 만약 나에게 문을 열어주시면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나의 거문고(1930)를 발표할 때까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30년대 이후 이전의 퇴폐적인 시에서 벗어나 건강한 전원시를 쓰면서부터이다. 1938년 습작기의 티를 벗은 파초를 펴냈는데 그중 파초〉 〈수선화와 해방 뒤에 발표한 하늘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빌어 조국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파초> <수선화> 외에 <수선(水仙) > <내마음> <나의 뜰> <바다> <하늘 ··> <명상> <술노래>들이 있다.

 

 후기의 시세계는 광복과 더불어 바뀌었는데 시집 삼팔선(1947)진주만(1954)1945년부터 1947년까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 사회시이다. 1957년 사회현실을 고발한 시집 목격자를 펴낸 뒤 4·19혁명을 고비로 시보다 정치평론을 주로 썼다. 1964년에 펴낸 내마음(1964)에는 그의 모든 시가 수록되어 있다. 수필집으로는 세대의 삽화(1964)모래 위에 쓴 낙서(1964)가 있고, 시집 진주만으로 1954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참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정치적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정치평론집 적과 동지》 《역사의 배후에서(1958) 나는 증언한다(1964)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