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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풍남문,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의 남문

by 혜강(惠江) 2019. 12. 21.



풍남문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의 남문

 

·사진 남상학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

경기전 맞은편에 있다.


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과거에는 흔히 풍패향, 풍패지향이라 불렀다.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풍남문이라는 이름에는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주성의 남문이 바로 풍남문이다.

 

전주에 도착하여

먼저 전주의 상징처럼 우뚝 서있는

풍남문으로 향했다.



풍남문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문답게

우람하게 보였다.

전주성벽이 헐린 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1963121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풍남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풍남문은 고려 공양왕 원년인 1388

최유경(崔有慶, 13431413) 관찰사에 의하여

처음 창건되었다.

그때 전주 부성을 쌓으면서

사대문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졌다.

(명견루기, 明見樓記)



풍남문은

선조 30년 정유재란(1597) 때 시련을 겪었다.

전주 부성으로 침공한 왜적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하면서

남문만 달랑 남겨두고 진주 부성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때 남문만 남겨둔 것은,

왜장 시마즈 유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가 전주성에 입성할 때

남문으로 돌파했다고 하여

이를 기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로 보면 자랑스러운 역사였기에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으리라.


어느 학자가

역사를 잊으면 나라를 잃는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기억해 두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우리 역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후, 성곽과 성문은

영조 10(1734), 조현명 관찰사가

부성을 크게 수축하였는데,

이때 남문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어진박물관 소장

 


그러나 명견루는

1767(영조 43) 큰 화재로 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 당시의 관찰사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풍남문 상량문(上樑文) 기록)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고 한 것은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그후 순종 때인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

도시계획의 하나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으나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이 묻히는 등

그 옛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지금의 풍남문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원모습이 드러났다.



풍남문(출처:문화재청 홈피)


현재 풍남문은

일반적인 성문과 마찬가지로

성벽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 기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중층 문루가 있다.


1층은 앞면 3, 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 옆면 1칸으로,

지붕은 겹처마를 둔 팔작지붕이다.



문루 2층의 남쪽 면에는

풍남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 면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풍남문글씨는 1842(헌종 8)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풍남문은 지금

전주 남문시장과 접해있어

풍남문을 주위로 원을 그리며 많은 차량이 통행한다.


현재 풍남문은

도로 한가운데에 구분되어 있어 들어가 보기가 쉽지 않다.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을 마치고

경기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행정보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1 (전동 83-4)

전화 : 063-281-2553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전주IC-> 전주시내-> 팔달로 방면->

덕진공원-> 금암광장-> 전북도청-> 풍남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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