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고종의 친필 비석이 있는 전주 오목대와 이목대

by 혜강(惠江) 2019. 12. 17.



전주 오목대와 이목대 

  

고종의 친필 비석이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


- 조선의 본향인 전주의 정체성 대변 -

 

·사진 남상학


 


▲오목대와 이목대에 남긴 고종의 친필비문 탁본 (어진박물관 소장)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는 조선왕조의 본향으로 조선왕조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온다. 특이 이곳에는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비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고종의 의중이 드러나 있어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오목대, 이성계가 전승을 자축한 곳


▲한옥마을 방향에서 오목대로 오르는 길


  오목대(梧木臺)오목대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언덕을 일컫는 말이다. 경기전에서 약 동남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한옥마을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언덕의 정상은 평평하고, 언덕에선 전주천과 전주 한옥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비각(왼쪽)과 오목대 누각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1380)에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장군이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抜都)의 무리를 정벌한 뒤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던 이곳에 들러 야연(夜宴)을 베풀고 승전을 자축하면서 중국 한 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면서 역성혁명을 통한 천하 제패의 야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오목대 누각


대풍가 편액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거대한 누각인 오목대현판은 악필(握筆)의 독특한 필체로 유명한 고창군 출신의 서예가 석전(石田황욱(黃旭, 1898-1993)의 것이다. 또 오목대 마루 위에는 대풍가의 편액이 걸려있다.


 큰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오르다

 위세가 해 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

 大風起兮雲飛楊 (대풍기혜운비양)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해내혜귀고향)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 뒤 고향 패현으로 돌아가 친척과 친지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고 스스로 이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그 후 유방은 한 고조가 되었다. 그러하니 대풍가를 불렀다는 것은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내비친 것이 아닐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 황제 주필 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고종이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기 위해 비문을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1974924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오목대 바로 옆 양사재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던 가람 이병기(李秉岐)가 노래한 오목대(梧木臺)’의 글이다.

 

  뒤에 오목대를 나는 매양 오른다

  허술한 주필각(駐驊閣)은 외로이 서 있으며

  즐비한 몇만 가옥이 내려다 다 보인다

  그 옆의 자만동은 목조(穆祖)의 고적지요 

  그 뒤의 발산(鉢山)은 이르노니 발이산(發李山)

  과연 그 오백 년 왕기가 여기 결인(結因)하였던가


 오목대 옆에는 가람 이병기가 시를 쓰던 양사재가 있다. 이 집은 현재 숙소로 사용하고 있으나 시인의 고택답게 현판과 주련은 여산 권갑석의 글씨로 세월을 짐작게 하는 고택의 향기가 획 하나하나에 새겨있다.

 


이목대,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가 놀았던 유적지


▲오목대에서 이목대로 가는 오목육교


▲이목대 표지대


 한편, 이목대(梨木臺)는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서 70m 위쪽에 있다. 천주교의 성지 치명자산이 있는 승암산 발치에 있다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용비어천가에 보면, 이목대 자리는 목조가 어릴 때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진법놀이는 풍물놀이나 남사당패 놀이에서 여러 사람이 이리저리 열을 지어 움직이는 놀이를 말한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당시 전주 부사와의 불화로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는 이성계가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니 이성계 집안에서는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고종 광무 4(1900),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역시 고종황제가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의 재건을 굳건히 하고자 했던 것으로 조선의 본향으로서 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이목대 비각과 비석

                                                                                                        

 이안사가 살았다던 집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할 때 170호의 일가 모두가 그를 따라갔다고 한다. 집터를 알 만한 사람이 모두 떠나 버린 것이다. 그 후로 4대가 흘러 이성계가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찾아왔지만, 집터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높은 대지 위에 이씨인 목조가 살았던 터란 뜻의 이목대(李穆臺)를 설치했다.

 

 비각은 애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1986, 도로 확장공사로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오목대(梧木臺)와 함께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돼 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