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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덕유산의 여름

by 혜강(惠江) 2019. 8. 3.

 

덕유산의 여름

 

능선 뒤덮은 기기괴괴 주목 · 형형색색 야생화 

 

 

 글·사진 박경일 기자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서늘한 능선길에서 마주친 전나무와 주목. 전나무가 바위에 몸을 딱 붙이고 몸을 뒤틀며 자라고, 그 뒤로 늙은 주목이 당당하게 버티고 섰다.

 

 

바야흐로 염천의 여름 한복판에서 산(山)으로 여정을 권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때에 무슨 산이냐고요? 이곳이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서늘한 대기 속에서 여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두 곳의 산. 전북 무주의 덕유산, 그리고 강원 인제의 점봉산입니다.

한낮만 아니면 반팔 차림으로는 서늘한 덕유산 중봉의 덕유평전과 점봉산 곰배령에는 지금 여름꽃들이 흐드러졌습니다. LIFE & STYLE은 두 주에 걸쳐서 그곳에 갑니다.


#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을 20분 만에 오르다

덕유산은 1975년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이자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앞에는 이렇게 딱 세 개의 산만 있다. 하지만 덕유산의 체감 높이는 순위에 한참 못 미친다. 사계절 끊임없이 행락객들을 실어나르는 덕유산리조트 스키장의 곤돌라 때문이다.

덕유산 아래 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단 20분 만에 해발 1520m의 덕유산 설천봉에 닿는다. 설천봉에서 정상인 향적봉(1614m)까지는 600m만 걸으면 된다.

덕유산은 봄부터 겨울까지 어느 계절 하나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봄이면 정상의 능선이 온통 철쭉과 털진달래로 뒤덮이고, 여름에는 원추리를 비롯한 갖가지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난다. 드넓은 품을 가진 능선에서의 가을 단풍 감상도 나무랄 데가 없다.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꽃처럼 피는 겨울은, 가히 덕유산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여름 덕유산의 매력이라면 오슬오슬 소름이 돋을 정도의 서늘한 공기와 화선지의 먹처럼 번지는 안개, 그리고 능선을 화려하게 뒤덮는 여름 야생화다. 이 중에서 덕유산을 여름 산행의 목적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시원하다’는 것이다. 물론 곤돌라를 타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갔다고 전제했을 때의 얘기다.

덕유산 정상 일대의 기온은 산 아래와 10도 안팎의 차이가 난다.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서 내리면 서늘한 기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대기 속에 마치 박하 향이 스며있는 듯하다. 곤돌라에서 내린 이들이 덕유산 정상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숲길 속으로 저절로 빨려 들어가는 건 이런 상쾌한 기분 때문이다.

 

 

사진 왼쪽부터 덕유평전에 지금 만개한 일월비비추꽃의 꽃봉오리. 이른 아침 향적봉 대피소 마당에서 풀을 뜯던 토끼. 운무가 밀려든 향적봉 대피소의 밤 풍경.

 

 

 

서늘한 숲 터널 넘어 해발 1500m 평원 … 일월비비추꽃이 반기네

 

# 덕유평전, 여름 야생화 꽃밭을 이루다

덕유산은 향적봉, 중봉, 백암봉, 동엽령,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 등 해발 1000m를 넘는 산봉들이 산맥을 이룬다. 해발 고도는 높지만 산의 형세는 부드럽고 푸근하다. 이처럼 여유 있고 넉넉한 산세가 바로 ‘덕유(德裕)’라는 이름을 만들었으리라.

덕유산의 능선 중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그리고 다시 백암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다. 그래서 여기를 ‘덕유평전’이라고 부른다. 여름 덕유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바로 이곳 덕유평전에 있다.

본디 덕유평전은 여름 원추리꽃 군락지로 이름났다. 그런데 정작 원추리 군락의 규모나 꽃은 눈에 띄게 줄었고, 대신 보라색 일월비비추꽃이 흐드러졌다. 일월비비추 말고도 덕유평전에는 다른 여름꽃들이 꽃밭을 이뤘다. 범꼬리, 꿩의다리, 산오이풀, 가는장구채, 기린초, 말나리, 동자꽃, 속단, 물레나물, 물양지꽃, 어수리, 참나물꽃, 바위채송화, 단풍취, 수리취…. 그냥 제 자리에 서서 눈 안에 들어오는 꽃 이름만 적었는데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덕유평전의 여름 꽃밭을 보는 것만으로도, 또 탁 트인 평원에서 주위의 산군(山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향적봉에서 중봉까지 이어지는 1㎞를 걸은 보람은 충분하다. 여기다가 바람이 지나는 길목인 덕유평전에서는 거센 바람 앞에 설 수 있고, 저 멀리 동엽령을 향해 아득하게 이어진 길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 산정 대피소에서 맞이하는 여름밤

덕유산 향적봉 바로 아래에는 ‘향적봉 대피소’가 있다. 대피소에는 모두 38명을 수용하는데, 여름에도 주말에는 빈자리가 없다. 리조트에서 곤돌라로 20분, 다시 걸어서 20분. 도합 40분이면 당도하는 향적봉 아래 대피소가 붐비는 이유는 단 하나. 이른 아침 덕유산 풍경을 기대하고 오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덕유산의 경관은 하루 중 이른 아침이 가장 훌륭하다. 여름이면 덕유산 일대의 산자락은 자주 운무에 휩싸인다. 짙은 운해가 밀려오면 봉우리들이 구름바다 위의 섬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덕유평전에서 맞이하는 일출도 장관이다. 폭염에도 이른 아침 산정은, 긴팔 덧옷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는 점도 매력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덕유평전에 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덕유산리조트의 곤돌라 운행 시작 시간은 오전 9시 30분. 서둘러서 첫 번째 곤돌라에 오른다 해도 향적봉을 거쳐 덕유평전에 당도하면 오전 10시 30분쯤 된다. 자욱했던 운해가 다 흩어질 시간이다.

덕유평전의 새벽을 보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입산 가능 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4시, 무주구천동을 출발해 3시간 30분 거리의 탐방로를 걸어 올라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전날 곤돌라로 올라와 향적봉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방법이다.

향적봉대피소에서의 하룻밤은 불편하다. 샤워도 할 수 없고, 행동식 등도 준비해가야 한다. 딱딱한 침상에서 담요 한두 장으로 밤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대피소에서의 하룻밤이 불편함만 있는 건 아니다. 서늘한 대기 속에서 긴팔 옷을 겹쳐 입고서 총총한 별빛을 감상할 수도 있고,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서 숲길을 걸어 고산 평원에서의 일출과 마주 서 볼 수도 있다.

 

 

덕유산 중봉에서 동엽령으로 이어지는 초록의 능선을 내려다본 모습. 덕유산에서는 정상인 향적봉보다 여기 중봉의 경관이 더 빼어나다. 향적봉에서 중봉까지는 평탄한 능선길로 2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 이른 아침에 일출의 덕유평전을 걷다

기상청의 장맛비 예보 때문인지 서른여덟 명을 수용하는 향적봉 대피소에는 일곱 명밖에 없었다. 친구와 선후배가 의기투합해서 왔다는 중년의 일행 다섯 명은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여 식사를 마치고는, 대피소 밖 나무 테이블에 앉아 늦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홀로 대피소를 찾은 한 등산객은 남덕유산의 긴 탐방로를 넘어온 길이라고 했다.

향적봉은 밤새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분무기로 뿜어낸 것 같은 자욱한 안개가 살갗에 닿자 금세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오후 9시 소등시간. 대피소에서 대여해주는 까슬한 군용 담요의 촉감이 새삼스러웠다.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대피소 문을 열고 나갔다가 산토끼와 딱 마주쳤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가롭게 대피소 마당의 풀을 뜯던 토끼가 겅중거리며 뛰어간 뒤를 따라 중봉으로 향했다.

야생화로 가득한 숲길 곳곳에는 늙은 주목과 전나무들이 더러는 죽어서, 또 살아서 기이하게 가지를 뒤틀며 서 있었다. 삽시간에 일대를 뒤덮은 운해가 중봉 일대를 빠르게 타고 넘었다. 안개로 꽉 찼던 숲길이 일순 환하게 드러났다가 뒤이어 밀려온 운무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덕유평전의 능선을 타고 넘는 구름 너머로 일출의 햇살이 황금빛으로 퍼졌다. 노란색 원추리꽃과 보라색 일월비비추꽃의 색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 선명하게 빛났다. 충만한 아침이었다.


# 덕유산에서 구천동으로 내려가는 길

덕유산은 워낙 품이 넓어 산행코스가 하나둘이 아니다. 전날 곤돌라를 타고 정상 향적봉까지 올랐다면, 이튿날은 중봉에서 덕유평전을 지나 동엽령을 넘어 삿갓재로 내려서는 4시간 30분 남짓의 코스를 택하는 게 보통이다. 남덕유산을 넘어 영각사 쪽으로 내려가는 7시간 남짓의 긴 코스를 택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여름 덕유산에서 ‘구천동’ 계곡을 빼놓고 갈 수는 없는 일. 그러자면 계곡 상류의 절집 백련사로 내려가야 한다. 백련사로 내려가는 2㎞ 남짓의 길은 가파르고 지루하다. 내내 닫힌 시야로 비탈을 내려가야 한다. 급한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허벅지 뒤쪽과 장딴지 근육이 뭉쳐지는 게 느껴질 정도다. 백련사에 당도하면 거기서부터 ‘구천동’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순한 길을 걸을 수 있다.

지금이야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한때 구천동은 깊고 깊은 오지(奧地)마을을 일컫는 대명사이기도 했다. 구천동이란 단순히 ‘궁벽한 산촌마을’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속세를 뛰어넘은 이상향의 의미도 스며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시간을 잊은 사람들이 사는 곳.’ 그곳이 바로 예전의 구천동이었다.


# 성불한 9000명 부처는 어디로 갔을까

그건 그렇고 구천동의 지명은 왜 하필 ‘구천’일까. 그 단서가 500년 전쯤 덕유산에 올랐던 갈천 임훈의 기행문에 있다. 기행문에 구천동은 ‘구천둔(九千屯)’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이 골짜기에 성불한 부처가 자그마치 9000명이나 살아 ‘9000명이 진을 치고 있는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이라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 9000명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산이 신령스러워 보이지 않을 따름이지 실제는 있다.” 이 깊은 곳까지 이유 없이 들어왔을 리는 없었을 터. 부처나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가 있었겠고, 몸을 숨기려 하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덕유산은 구도자나 은둔자의 비밀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구천동 골짜기에는 향적암, 하향적암, 장유암, 북암, 삼수암, 청암, 탁곡암 등 절집 일곱 곳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백련사 한 곳만 남았지만 말이다.

신라 때 창건된 백련사는 일제강점기 홋카이도(北海道)제국대학의 대학림(大學林)으로 지정돼 사찰 건물이 죄다 일본식 초가로 바뀌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고, 6·25전쟁 때는 사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기도 했다. 지금의 백련사는 196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 복원된 것이다.

덕유산 정상이 제33경이고, 백련사는 제32경. 백련사에서 구천동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31경 이속대, 30경 연화폭포 순으로 경관이 이어진다. 오랜 세월 동안 큰물이 지나면 계곡이 흐트러졌을 것인데도, 경관 하나하나에서 이름에 담은 뜻이 새겨지는 건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 구천동 경관에 매달아둔 시(詩)

구천동 33경에 달아준 이름들은 하나같이 시다. 어떤 곳은 이름의 정취가 경관을 넘어서기도 한다. 백련사 산문을 나서자마자 ‘세속에서 물러난 바위 언덕’이란 뜻의 이속대(離俗臺)가 있고, 이어 ‘거울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이름 명경담(明鏡潭)이 있다. ‘계곡 물소리가 거문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금포탄(琴浦灘)이고, ‘차를 달이던 바위’라는 뜻의 다연대(茶煙臺)도 있다. 구천동은 달빛도 고왔던 모양이다. ‘아홉 개의 달이 비추는 못’이란 뜻의 구월담(九月潭), ‘달빛 아래로 떨어지는 계곡 물’을 뜻하는 월하탄(月下灘), ‘달을 새겨놓은 연못’이란 뜻의 인월담(印月潭)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구천동의 33경을 헤아려가며 걷겠다면 기존의 아스팔트 탐방로보다 계곡 건너편에 2016년 복원한 ‘어사길’을 걷는 게 백번 낫다. 어사길은 구천동 주민들이 백련사를 오갈 때 이용했던 옛길로 ‘어사’란 이름은 어사 박문수가 구천동을 찾아 민심을 헤아렸다는 설화에서 나온 것이다.

어사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지금은 사라진 구천동 마을 깊숙한 솔숲 아래 비밀처럼 숨겨진 23개의 크고 작은 불상이었다. 1960년대 초 무주가 고향인 한 퇴역군인이 500년 전 임훈의 기행문에 나오는 ‘구천동의 9000명 부처’를 기리기 위해 ‘9000개의 불상’을 세우려고 했으나 23개만 세우고 중단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가 세운 건 미륵불이다. 그는 왜 이 깊은 골짜기를 미륵으로 뒤덮고자 했던 것일까.


■ 여행정보

 

 

 

덕유산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 곤돌라 왕복 요금은 1만6000원. 편도 요금은 1만2000원이다. 토·일요일은 오전 9시부터, 평일은 오전 9시 30분부터 운행한다.

설천봉에서 곤돌라를 내려 20분만 걸으면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에 닿는다. 향적봉 대피소 침상이용료는 1만3000원.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계획한다면 숙면을 위해 귀마개부터 챙겨야 한다. 모포는 한 장에 2000원에 빌려주지만 베개는 없다. 캠핑용 베개를 가져가는 게 좋다. 휴지와 물티슈도 챙겨가자. 대피소에서 판매하지만 가격이 산 아래의 두 배쯤이다. 화장실이 대피소 밖에 따로 있어서 헤드렌턴을 챙겨가는 게 좋다.

향적봉에서 백련사를 거쳐 구천동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하산 코스는 8㎞로 3시간쯤 소요된다. 중봉에서 오수자굴을 거쳐 백련사, 구천동으로 내려오는 9.7㎞의 좀 더 긴 길도 있다. 이쪽 길을 택하면 3시간 30분쯤 걸린다. 덕유산리조트에는 사우나와 찜질방이 있다. 사우나가 동네 목욕탕 수준이긴 하지만 산행을 마친 뒤에 이용하면 좋다. 이용요금 1만 원. 리조트 내의 티롤호텔 등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리조트 시설이 전반적으로 낡은 편이어서 좀 아쉽다.

무주의 맛이라면 금강 상류에서 잡은 모래무지와 동자개(일명 빠가사리)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만든 어죽과 어탕. 무주읍에서는 무주농협 인근의 금강식당(063-322-0979)과 무주 반딧불시장 안의 반디어촌(063-324-1141)이 맛집으로 꼽히는 곳이다. 내도리로 건너가는 앞섬다리 부근의 앞섬마을(063-322-2799), 뒷섬마을의 큰손식당(063-322-3605) 등도 이름났다. 무주리조트 인근의 생두부촌(063-322-7771)은 두부 음식 전문점인데, 여름철에 내는 콩국수가 괜찮다.

 

<출처> 2019. 7. 31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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