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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수탈과 아픔의 창구 군산, 식민지 상처로 얼룩진 땅에서 '사람의 역사'를 만나다.

by 혜강(惠江) 2019. 3. 7.

 

수탈과 아픔의 창구 군산

 

식민지 상처로 얼룩진 땅에서 '사람의 역사'를 만나다.

 

 

군산 = 글·사진 박경일 기자 

 

 

 

전북 군산의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건물을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군산근대건축관’에 설치된 강용면 작가의 작품 ‘민족의 함성’. 독립유공자는 물론이고 우리 민족에 도움을 준 여러 국가의 인물을 합쳐 5000명의 얼굴을 새겨 만든 작품이다. 동그란 안경을 쓴 백범 김구의 얼굴이 선명하다.

 

 

 전북 군산은 일제강점기 곡창 지대였던 호남 지역의 쌀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반출되던 창구로서 번성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군산은 번영과 부를 약속하는 기회와 희망의 도시였지만, 우리들에게는 수탈과 아픔의 항구였지요. 식민지의 상처가 깊이 파인 군산의 곳곳을 들여다보면서 여러 명의 이름이 따라왔습니다. 그곳의 역사를 ‘사람’이란 열쇠로 열어보았습니다.


# 도(道)를 목숨과 맞바꾸다…송병선

 군산 임피면 술산리에는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풍수 명당이 있다. 예부터 호남의 지관들이 수시로 구경하러 왔을 정도로 이름난 명당이다. 우리나라 최고 명당만을 골라 묘를 쓰고 있다는 광산 김씨 집안의 무덤도, 고건 전 총리 조상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그 명당 중에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에 그의 무덤이 있다.

 구한말 군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 선생. 스물세 번이나 관직에 임명됐음에도 모두 사양했던 그는 무주 구천동과 군산 고봉산 아래 기거하며 평생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다.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에 차 서울로 올라가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 파기와 오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답을 기다리다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고향인 대전으로 호송됐으니 이때가 그의 나이 70세였다.

 목숨을 건 상소가 무위로 돌아가자 송병선 선생은 1905년 음력 12월 30일, 황제와 국민, 유생들에게 을사오적 처형과 을사늑약 폐기,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세 번에 걸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기,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도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비보를 접하고 비통에 빠진 군산의 유생들은 고향에 묻은 송병선 선생의 시신을 군산 최고의 명당인 술산으로 이장하고자 했다. 술산에는 이미 선생의 부인 묘가 있었다. 하지만 술산 명당 터에 대한 마을 사람의 집착이 얼마나 컸던지 선생의 이장 행렬을 마을청년들이 막아섰고, 급기야 선생의 묘를 쓸 터에다 명당의 기(氣)를 쇠하게 한다는 고춧가루를 뿌리기도 했다는 이야기. 도대체 이 무슨 결례였을까.

 술산 교회 뒤편 언덕에 조성된 송병선 선생의 묘는 근래 손을 봐서 단정하다. 그리 크지 않은 묘역에서는 선비의 격조가 느껴진다. 무덤 뒤쪽에다 줄 맞춰 호위하듯 자라는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묘역 아래에는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더 있다. 선생의 몸종이었던 공임(恭任)의 묘다. 공임은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통곡으로 날을 지새우다가 10여 일 만에 제 손으로 목을 칼로 찔러 자결했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열여섯의 소녀였다. 무엇을 지키고자 그는 목숨을 던진 것일까. 죽음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외세의 침략과 근대의 유입으로, 기존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 사이가 끊임없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 금고의 이름으로 남다…시마타니

 군산 개정면 발산초등학교 뒤뜰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시타마니 금고’가 있다. 말이 금고지, 실은 시멘트로 지은 2층짜리 독립건물이다. 금고에 붙여진 이름의 주인공인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 군산에서 두 번째로 맞닥뜨린 인물이 바로 그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인 시마타니는 1903년 군산에 정착했다. 일본에서 술을 빚는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그는 술의 원료인 값싼 쌀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시마타니는 자신의 이름을 딴 농장을 세우고 군산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불과 7년 만에 시마타니 농장의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두 배에 육박하는 145만8000평으로 불어났다.

 식민지 시절에 일본인 지주가 땅을 늘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이자를 뜯는 고리대금업이나 수확량 70% 이상을 뜯어가는 소작으로 돈을 불려 땅을 사들였다. 땅을 나눠준다며 간척사업을 벌인 뒤에 손바닥만 한 소작 땅만 내주는 일도 허다했다.

 시마타니 금고의 정식명칭은 ‘구(舊) 일본인 농장 귀중품 창고’다. 반지하까지 치면 3층이나 되는 높은 단독 건물에는 ‘금고’보다 ‘창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지만, 엄청난 두께와 무게의 철제문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미국에서 수입해 달았다는 철문은 육중하기 짝이 없는 진짜 금고문이다. 문에는 ‘MADE IN USA’ 글씨가 선명하다. 시마타니가 이렇게 육중한 금고 철문으로 닫아걸고 꼭꼭 숨겼던 것은 무엇일까.

 시마타니 금고의 반 지하층에는 비상시에 대비한 음식 등을, 1층에는 농장의 서류와 현금을, 2층에는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조선의 고미술품을 보관했다고 전한다. 3층짜리 집 크기의 금고는 땅문서와 돈과 보물로 그득했을 것이었다. 보물을 금고 안에만 놓아둔 건 아니었다. 시마타니는 지금의 발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자신의 집 정원에 석등이나 석탑, 부도, 문인석 등으로 일종의 컬렉션을 만들었다. 수집이라고는 하지만 강탈하거나 훔쳐온 것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조선의 눈믈로 채워진 금고, 텅빈 공간은 '근대의 보물'로 남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전북 군산의 이른바 ‘째보 선창’ 주변의 저녁 풍경. 일제강점기 수면매립과 어시장 개장으로 크게 번성했던 어항이었던 째보 선창 주변은 이제 녹슬고 쇠락한 포구가 됐다. 식민지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 소설의 장면을 동상으로 재현해 놓은 군산 임피역 역사. 일본인 모리기쿠가 조선 땅에서 후손들이 영원히 번성하라는 기원으로 세운 ‘보국탑’의 잔해. 군산 발산초등학교 뒤뜰의 시마타니 금고, 을사늑약에 애통해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병선 선생의 묘, 뜯겨서 이웃 마을에 지어진 일제강점기 군산의 조선인 거부 문종구의 집 사랑채.

 

# 시마타니 조선인으로 귀화를 꿈꾸다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남아있는 31점의 석물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보물로 지정된 발산리 5층 석탑과 발산리 석등이다. 두 개의 석물은 전북 완주의 봉림사라는 절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인데, 뽑혀 와서 사마타니의 컬렉션이 된 뒤 지금껏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석탑과 석등은 본래의 자리라도 알려졌지만, 부도나 무인석, 돌로 깎은 양 등 나머지 석물들은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군산 발산초등학교 뒤뜰의 정원 컬렉션과 시마타니 금고는 일본인 지주가 식민지에서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쌓았던 부를 상징한다. 그가 창고에 쌓아둔 것은 식민지 착취로 얻은 제국의 전리품이었다. 시마타니는 전리품을 보면서 제국의 승리에 취했으리라. 하지만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제국은 반세기를 버티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시마타니는 일본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평생을 일군 광활한 농토와 거대한 금고 속의 재물을 두고 맨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미 군정청에 귀화신청까지 하면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했다. 귀화 심사 통과를 위해서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조선어 공부까지 했을 정도였다. 42년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으니 시마타니는 이곳을 제 나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대공습으로 폐허가 된 일본이 오히려 낯선 외국과 같았으리라.

 시마타니와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틴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귀환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들이 살아온 조선 땅이 ‘부당하게 침략해서 빼앗은 곳’이란 자각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귀국을 거부하던 시마타니는 결국 미군정청의 강제 권유로 손가방 두 개만 지닌 채 부산항에서 마지막 귀국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귀국 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시마타니가 귀국한 뒤 미군정청이 트럭으로 실어내 갔다는 보물도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 구마모토의 제국, 그리고 이영춘

 

▲ 군산 월명공원 3·1운동 기념탑 곁에 세워진 만세운동 동상. 군산의 3·1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이른 1919년 3월 5일에 시작됐다.

 시마타니가 군산의 부자였다지만, 구마모토 료헤이에다 대면 말 그대로 ‘새발의 피’였다. 구마모토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명실상부한 최대 농장주였다. 군산 일대에 그가 가진 땅만 자그마치 1000만 평이나 됐다. 서울 여의도의 13배가 넘는 규모다. 그의 땅을 부쳐 먹는 소작인들만 3000가구 2만여 명에 달했다. 그의 농장은 ‘하나의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조선에 발을 디딜 당시 구마모토는 젊고 야심만만한 인텔리였다. 게이오 대학 재학 중 정부의 이민권유로 조선에 처음 발을 디딘 구마모토는 군산에서 농장 개척의 가능성을 보고 일본의 한 신문에다 장밋빛 미래를 그린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글을 본 독자들로부터 투자금을 받은 땅을 사들여 농장을 세우고 확장을 거듭했다. 젊고 명민한 그는 최신농법을 도입하고 소작료를 올려가면서 닥치는 대로 땅을 사들였다.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거대 농장을 경영했으면서도, 구마모토는 소작인들로부터 그다지 인심을 잃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구마모토는 특이하게도 농장 안에다 소작인의 진료를 책임지는 ‘진료부’를 두었다. 진료소를 둔 게 소작인의 건강을 진정으로 걱정했다기보다는 질병이 돌면 수확량이 급감하기 때문이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지만, 구마모토는 진료부에 의사를 두어 소작인들을 진료하게 했다.

 구마모토 농장에서 소작인을 돌본 이가 농촌 의료개선에 평생을 바친 이영춘 박사였다. 그는 구마모토 농장에서의 진료경험을 토대로 해방 후에도 가난한 농민을 위한 예방의학에 헌신했다. 전염병 퇴치에 앞장섰고, 간호사 양성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간호대학을 설립했으며 국내 최초의 민간 의료조합을 구성하기도 했다. 다른 농장과 마찬가지로 높은 소작료를 받아 챙겼음에도 구마모토의 악행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은,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했던 이영춘 박사의 선행에 힘입은 것은 아니었을까.

 구마모토는 도쿄(東京)와 경성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봄 파종기와 가을 수확기에만 구마모토 농장을 찾았음에도, 제국의 상징처럼 농장 한가운데다 거액을 들여 독특한 양식의 별장을 지었다. 해방후 구마모토가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도 이영춘 박사는 소작농의 요청으로 농장에 머물면서 구마모토가 지은 별장에서 지냈다. 등록문화재인 이 건물에 ‘이영춘 가옥’이란 이름이 붙여진 연유가 이렇다.

 이영춘 박사의 전시관이 된 이영춘 가옥은 문화해설사가 상주해 따스하고 차분하게 관람객을 맞는다. 식민지 제국의 부를 과시하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따스한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한 의사의 일생을 기리는 공간이 됐다.

# 홀몸의 제주 고씨가 일군 거대한 부

 

 군산에 일본인 지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군산 옥산면에서 회현면에 이르기까지 120여 만 평의 땅을 가졌던 조선인 거부(巨富)도 있었다. 옥산면 남내리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남평 문씨 집안의 종손 문종구 얘기다.

 만석꾼이던 문종구는 나이 스물여덟 살 때 이리(익산)~군산 간 철도 노선이 농장 옆을 지나게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노선 계획을 변경시켰을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집에 전화 한 대를 놓기 위해 군산에서 8㎞ 떨어진 집까지 65개의 전신주를 개인 돈으로 세워서 전화를 가설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다.

 토지 대장만 책 30권이 넘었다는 남평 문씨 집안의 부는 문종구의 어머니 제주 고씨가 일군 것이었다. 제주 고씨는 콜레라 창궐로 아침에 시아버지를, 저녁에 남편을 잃는 변고를 겪었음에도 홀몸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거부가 된 고씨는 1911년 흉년에 가난한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어 1917년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유복자인 문종구 역시 구휼에 앞장서 옥산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문종구는 소작농을 두고 농장을 운영했지만 일본인 지주처럼 소작인들과 마찰을 겪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나포의 십자 뜰에 갖고 있었던 토지 3만 평 전부를 농업학교로 옥구중학교에 희사하는 등 사회사업도 많이 했다. 그러나 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많았던 재산이 해방 후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연기처럼 사라졌고, 자손들은 하나둘 군산을 떠났다.

 문종구의 고래등 같은 저택은 비워둔 채 쇠락했다가 후손들이 지난 2010년 고택의 1400여 평의 대지와 가옥 전체를 군산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지금은 마을기업 ‘알콩달콩영농조합법인’이 공동체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택에서 문종구의 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건물은 이제 다 사라지고, 신축 한옥건물만 남아있다. 70년 전쯤 뜯겨 인근 금성마을에 옮겨 지어졌다는 사랑채 건물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 사랑채 역시 빈집이 된 지 수십 년이 넘어 쇠락할 대로 쇠락했지만 말이다.

# 후손의 번성을 믿다…모리기쿠

 군산의 월명공원은 과거 ‘각국공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개항 직후 군산에 각국 조계 지역이 활성화되던 무렵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각국공원은 1914년 조계 지역이 폐지된 이후에는 ‘군산공원’이 됐다. 일본인들은 공원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내고 벚나무를 심었다. 자칫 오해할 수 있으니 첨언하자면, 지금의 벚나무는 그때의 것을 베어낸 뒤에 다시 심은 것들이다. 아무튼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벚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일본인들이 월명공원으로 소풍을 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는데, 이런 날이면 군산 양조장에서 빚는 일본 술이 동날 지경이었단다.

 일제강점기 이 공원에는 수많은 기념탑이 세워졌다. 군산항으로 200만 석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간 것을 기념해 1934년에 세운 ‘개항 35주년’ 기념탑이 있었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한 보국탑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형상화한 공자묘도 있었다. 기념탑과 보국탑, 그리고 공자묘는 모두 1995년에 일제 잔재 청산작업의 일환으로 철거하거나 부쉈다.

 이 중에서 보국탑과 공자묘는 일본인 지주 모리기쿠 고로(森菊五郞)의 소유였다. 그는 스무 살에 부산에서 장사를 하다 러·일전쟁이 나자 만주로 건너가 재물을 모은 뒤 이 돈으로 군산에 농장을 개설해 군산의 유지가 된 인물이었다. 돈만 많았던 게 아니라 권력욕도 강해 도의회의원과 부의회의원 등 수많은 직책을 역임했다.

 그가 보국탑과 공자묘를 세웠던 것은 아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이었다. 군산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를 다니던 모리기쿠 아들은 급진 우익단체에 가담해 일본 총리를 암살한 ‘오일오 사건’에 연루됐다. 화가 집안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모리기쿠는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탑을 세웠다. 그 곁에다가는 부처, 예수, 공자 등 동서양의 현자 상을 모아놓고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는 ‘공자묘’를 지었다.

 

 보국탑 면석에는 탑의 이름을 ‘보국(報國)’이라고 한 까닭이 적혀 있었다. “그(모리기쿠)의 후손이 이 탑 아래 영원히 살면서 나라에 보답하는 뜻을 더욱 굳건히 하길 기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가당찮게도 이 땅에서 자신들의 후손이 영원히 번성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개항 35주년 기념탑도, 보국탑도, 공자묘도 지금은 철거돼 파편만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마당에 뒹굴고 있다. 과연 무너뜨리는 게 나았을까. 오만방자했던 행적을 담은 유물을 남겨 두고두고 기억하며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출처> 2019. 2. 6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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