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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전주 한벽당, 자연과 어우러진 풍류의 멋

by 혜강(惠江) 2019. 12. 17.


전주 한벽당


자연과 어우러진 풍류의 멋

 

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2 (교동 산 7-3)

 

.사진 남상학   




 전주 한벽당(寒碧堂)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이다. 승암산에서 서북편으로 이어지는 지맥 중에서 남측면 경사진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전주천이 북향하다가 크게 방향을 틀어 서향하는 가장 바깥과 맞닿는 곳이다.


 병풍바위 아래 아담한 정자가 한벽당이다. 말하자면 전주천을 배경 삼아 발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위 절벽을 깎아 만든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물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았다. ‘한벽루라고도 불린다.


  

 한벽당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月集) 최담(崔霮)의 별장이다. 고려말 중랑장 최용봉의 장남으로 태어나, 말년에 전주 발이산 밑에 한벽당을 짓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600년 전(태종 4) 건립 당시, 후손들이 선생의 호를 따 월당루라고 했고, 현재는 한벽당, 혹은 한벽류라도 불린다. 어떤 연유로 이름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한벽(寒碧)’은 주자의 시 중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따왔거나 옛 지명에서 따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한벽당이 한벽루로도 불리는 이유 역시 알 수 없다. ‘은 여러 건물이 있을 때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곳이며, ‘는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다락구조의 집을 뜻하는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형태상으로 보면 가 맞는 것 같은데 왜 한벽당이라 했을까 격으로 따지면 한벽당이 높으므로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작지만 또 하나의 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과거에는 바위에 부딪힌 안개를 '한벽청연(寒碧晴烟)'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이름 그대로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혀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고 해서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경치가 뛰어난 한벽당은 조선 500여 년간 전주 선비들이 풍류를 담아냈던 곳이다. 5평 남짓 너른 마루와 서까래, 처마 밑을 에두른 시인 묵객들이 제영(題詠)한 수많은 시는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담론의 장과 예술인들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익현은 1897년 한벽당 중수기에서 푸른 바위 깎아내어(削成蒼石稜)/ 차가운 연못 푸른 물 위에 그림자 비추네(倒影寒潭碧)”라고 노래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누각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여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은 시문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전라도 관찰사로 부임중에 주 임지였던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한벽당에 들러 한벽당이 오나라 당시 지명은 무창(武昌)으로 무로써 나라를 다스려 흥하게 한다라는 의미의 이무이창(以武而昌)에서 따왔다는 무창루(武昌樓)라며 극찬하며 감흥을 남겼다.


시골 먼 호 중의 한 도회지인데

웅대한 진번은 오직 이 한 고을이라오.
정자는 웅장하고 화려함을 꺼리고

수석이 맑고 그윽한 곳에 자리했네. 
아름다운 배는 잔물결 일며 달맞이하고

아로새긴 난간에 내리는 비 가을을 보내오.
서쪽으로 나아가 부절지에 머물러

무창루(武昌樓)에 이르러 흥취 절로 인다오.


湖海一都會 雄藩獨此州

亭臺嫌壯麗 水石占淸幽 

畵舸波迎月 雕欄雨送秋

征西駐節地 興在武昌樓


 누각에 오르면 주변 풍광이 시인들에게는 저절로 감흥을 떠올리게 할 만큼 멋지다. 이와 같은 정황은 남, 신광수 등이 남긴 한벽당 관련 시를 통해서 조선 후기 전주의 누정에서 펼쳐졌던 화려한 연희를 엿볼 수 있다. 또, 남공철(南公轍,1760-1840)은 한벽당에서 연행된 검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붉은 치장 가볍게 들고 도는 춤

전립에 바람 불리고 가슴엔 옥전을 찼는데

엇바뀌 추는 춤 봄나비 촛불을 맞보내는 듯

낮았다 높았다 가을제비 화려한 잔치 휘젓는 듯

멈칫 손 내리니 날씨 개이자 우레 멈추듯

금시 허리 돌리니 안개가 걷히듯

공손량의 검무가 전해진 것이라지만

오히려 장욱이 글씨 배우든 생각을 하지.(금륭집 권 2)



 신광수 역시 1749넌 한벽당의 모습을 '한벽당 12'으로 지어 <석북집>에 남겼는데, 그 가운데 전주 한벽당에서의 춤추는 것을 보고 나서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소회하였다.


전주 아녀자(기녀)들은 남장을 잘하지

한벽당에서 검무가 한창이네

유리빛 푸른 물에 그림자 보려하나 보이자 않고

한벽당 안에 돌려 추는 춤 서릿밭 같네.(한벽당 12)


 이로 볼 때 한벽당은 풍치가 뛰어나 예로부터 중앙과 지방관아의 정치인들, 시인 묵객들이 틈나는 대로 한벽당에 찾아와서 시를 읊고 가무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현대에 와서도 최승범 시인은 '한벽청연'에 담기었을 선비의 흥취와 그 아련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저 숲에서 오는/ 바람 소리 물소리에

마음 가벼운/ 이 고장 선비들

한벽당 음률일 때면/ 이 내도 너울너울

푸른 가운으로/ 술잔에 어려 들어

맑은 흥 결 마냥/ 춤사위로 돋우었다네

한벽당 저 날의 이 내/ 그리워라. 오늘이여


 지금은 도심의 복판에 있어 차량소리로 북적이지만 불과 몇 백년 전만 해도 풍류가 단단하게 배어있는 한벽당은 풍류문화를 펼쳤던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명소였다. 또 전주 토박이 서민들에게 최고의 피서지는 한벽당 앞 전주천이었다. 아름다운 풍광과 깨끗한 물이 피서객들을 불러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벽당은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 앞 냇물을 가로질러 한벽교가 설치되어 옛 멋의 진가를 찾을 수가 없다.


 거기에다 전주 한옥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정작 한옥마을의 산증인인 한벽당은 뒷전이 되었다. 관광객들은 물론, 전주시민들에게마저 한벽당은 별 존재감이 없게 되어 이제는 그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하나의 역사물이 되고 말았다.




 한벽당 옆으로 난 한벽굴 (寒碧窟)1931년 전주-남원 간 전라선을 개통하면서 만들어진 터널로 1981년 철로가 전주시 동부 외곽으로 이설될 때까지 50년간 전라선 열차가 통과하던 곳이다.


 한편, 한벽굴을 전주팔경의 하나인 한벽당이 자리잡고 있는 승암산 자락에 건설한 것은 일제(日帝)가 당시 조선인들이 신봉하던 풍수지리사상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벽당의 풍광과 정기를 끊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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