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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 시대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큰 스승의 발자취

by 혜강(惠江) 2019. 4. 23.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

시대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큰 스승의 발자취

 

글․사진 남상학

 

 

 

안중근의 유묵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견리사의견위수명()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는 뜻의 글귀로, 이 돌비남산 안중근기념관 앞뜰에 서있다.

 

  봄기운 감도는 어느 날, 지하철 회현역에서 내려 남산공원으로 올랐다. 동료들과 남산을 걷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앞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남대문 쪽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오르는 길은 좀 가파르지만 서울 중심부를 굽어보는 남산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남산을 오르는 이들은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남산 언덕에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31세의 나이로 순국한 날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남산 백범광장 우측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본래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뜻을 추모하기 위해 1970년에 1층 석조 기와집으로 건립되었던 것인데, 낡고 초라하여 201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옛 기념관을 철거하고 3층 규모의 새 기념관을 개관했다. 안중근기념관은 2010년 건축과 동시에 서울특별시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외관은 현대식 건물이면서도 세련되어 있고 단아했다.

 

 

▲기념관 앞뜰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민족정기의 전당'임을 알리는 돌을 앉혔다. 

 

 

 대지 5,772㎡, 연면적 3,759㎡의 3층 규모의 기념관은 지하 1층에 제1전시실, 추모실,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지상 1층에는 제2전시실, 북 카페가 있고, 지상 2층에는 제3전시실, 기획전시실, 종합영상실, 수장고가 있다.

 

 소장품으로는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등 유묵, 〈국가안위노심초사〉 외 휘호, 안중근 의사 존영 외 사진, 〈안중근 의사 공판기〉 외 책자 등이 있다. 그 밖에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안중근 의사가 운영한 돈의학교 관련 기사,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총탄,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의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입구 변면에 새긴 안증근 의사의 어록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는 안중근 의사의 어록이 그의 힘찬 글씨체로 우리를 맞는다. 문을 들어서서 데스크를 지나면 바로 참배 홀이다. ‘大韓獨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태극기를 배경으로 안중근 의사의 석상이 책상에 앉은 자세로 꾸며져 있다.

 

 

▲참배홀

 

▲안 의사의 어록을 적은 현관 게시물

 

 

제1전시실, 추모공간, 안 의사의 출생과 가문

 

 나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선생께 묵념으로 예를 올리고 돌아서면 상징공간이다. 상징 공간 벽에는 31세의 젊은 안중근 의사가 동료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동판으로 꾸며져 있고, 순국 당시 안 의사께서 두 동생에게 남간 마지막 유언이 적혀있고 안중근 의사 손바닥 도장이 선명하다.

 

 

▲의병을 독려하는 안 의사의 모습이 벽면에 동판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 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면서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의사가 두 동생에게 남간 마지막 유언과 단지한 안중근 의사의 도장

 

 글을 읽는 동안, 국권 회복을 향한 안 의사의 의지와 나라 사랑의 정신이 확고하며 열의에 차 있다는 사실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된다.  숙연한 마음으로 지하 1층의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1)격동의 시대,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2)안중근 의사와 그 가문을 소개한다. 항일 독립운동의 명가(名家) 15명이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으며, 안중근 의사께는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만큼 안 의사의 가문이 항일 독립운동의 명가임을 보여준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중근 의사 외에15명이 독립운동의 공로로 훈장을 받을 만큼 항일 독립운동의 명가로 알려져 있다.

  

 

제2전시실, 안중근 의사의 각종 활동

 

 제2전시실에는 (1)안중근 의사의 활동도, (2)안중근 의사와 천주교, (3)을사늑약과 해외망명계획, (4)교육운동, (5)국채보상운동, (6)해외활동, (7)의병투쟁, (8)동의단지회 등이 차례대로 전시되었다. 그의 활동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들며 항일 활동울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수년 간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05년 을사년, 일제는 일제가 군사력으로 주권을 강탈했다.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도 깊숙이 개입하였다. 얼마 뒤에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주권 회복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주권 회복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익을 앞에 두고는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내 목숨을 내놓는다( , 견리사의 견위수명)."라는 글을 즐겨 썼던 안중근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중국의 산둥․상하이 등지를 시찰했다.

 

 

 

안중근은 항일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중국의 산둥․상하이 등지를 시찰했다.

 

 

  또,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침략이 깊어지자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1906년 평양에 삼흥학교(오산학교 전신)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도 펼쳤다.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육활동 전개

 

 

  그런가 하면 1907년에는 국채보상회 관서지부 설치 등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임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맞아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 1,300만 원이던 대일 국채가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지도부가 구체적인 전망과 통일된 조직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자발적인 대중운동으로 애국심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이후 민족운동의 동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07년 국외 망명을 떠난 안 의사는 연해주의 한인사회 결속과 환란 구제를 위해 러시아 에서 결성된 한인 구국운동 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해주에서의 활동 및 해외 독립운동 전초 기지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의병활동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 의사는 1908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대장 및 아령지구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데, 이 때 안 의사는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평화사상을 보여준다.

 

 

 

 

▲의병활동에도 적극 가담

 

  1909년 초에는 11명의 동지들과 일심 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는다. 단지동맹은 1909년 2월 7일 러시아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12명의 동지들이 일본의 지배가 국내외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던 와중에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결성한 소규모 결사대로서 12명의 동지는 왼손의 약지(藥指)를 끊어 피로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쓰며 맹세하였다. 동지회를 주도한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는 거사를 단행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활동 내용

 

 

제3전시실,  

역사를 뒤흔든 여섯 발의 총성(하얼빈 의거)과 뤼순 법정에서의 재판과정

 

  2층 제3전시실에는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장면과 뤼순 법정에서의 재판과정이 밀랍인형을 통해 완전하게 재연돼 있다. 안 의사가 어떻게 의거에 성공했고, 죽음을 맞이했는지 온전히 보여준다. 뤼순감옥을 재연한 공간에서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안 의사의 옥중 유서와 육필원고, 휘호, 안 의사 실물이 담긴 사진도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계획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승차장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는 장면 - 그날 오전 9시,이토가 탄 열차가 하얼빈역 플랫홈에 멈추고 기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이 끝나고, 출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던 순간이었다. 러시아 군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 의사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역사를 뒤흔든 총성이었다. 흉복부에 3발을 맞은 이토가 쓰러지고,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 중 일본인으로 보이는 3명에게 다시 3발을 쏘았다.     

 

 저격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잡힌 안 의사는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를 연속적으로 삼창하였다.  '코레아 우라'는 우리말로 "대한민국 만세"라는 뜻이다. 안 의사의 의거는 이후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추진과 결행

 

 

 

▲의거 현장과 저격에 사용된 권총과 총알 

 

 

▲하얼빈 의거 자료

 

▲하얼빈 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이후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으로 옮겨졌다. 다음해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안 의사는 6번의 재판을 받는다. 재판 과정에서 안 의사는 "하얼빈의거는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므로 만국공법에 의해 나를 (전쟁 포로로) 처리해줄 것"을 재판부에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재판부의 결정은 이미 일제 외무성의 명령대로 '사형'이 정해진 상황, 안 의사의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얼빈 의거 후 체포되어 법정투쟁을 전개하다.

 

 재판 과정에서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는 “옳은 일을 한 것이니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치 말라”며 항소 포기를 당부했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안 의사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옥중에서 자서전 등 저술

 

 안 의사는 옥중 생활 동안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 200여 점으로 추정되는 옥중 유필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57점이며,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산재해 있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1910년 3월 15일까지 자신의 출생부터 순국하기 전까지의 삶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 독립운동 등의 행적을 밝힌 자서전이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 집필

 

 

 또 안중근 의사는 <안응칠역사>에 이어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는데, 책의 구성은 서, 전감, 현상, 복선,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이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3월 26일 사형을 집행시켜서 시와 전감 일부만 집필하고 나머지는 목차만 남겨둔 채 끝내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동양평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의 시대를 동양과 서양이 경쟁하는 시대라고 하였고, 러일전쟁 당시 한국과 청국이 옛 원한을 잊고 일본을 지원한 까닭은 일본 천황이 선전조칙에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 라고 명시했고, 러일전쟁이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의 행위가 러시아의 만행보다 더 심각하다. 이는 ‘동양의 평화와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과 달리 러일전쟁이후 오히려 한국을 억압해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만주 장춘 이남을 점거해 동양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이며 이러한 일본의 행동은 오히려 서양을 도와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계속 핍박을 가한다면,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같은 인종에게는 능욕당하지 않을 것이다.”

 

 

<동양평화론>는 아깝게도 <전감> 일부만 집필하고 미완의 책이 되었다.

 

 이렇듯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넘보고 있을 때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국이 각기 독립국으로서 서로 침략하지 않고 협력할 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서국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으며, 이때에 비로소 동양의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오늘날의 EU, APEC등의 국제연합과 같은 것을 100여 년 전 이미 구상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사상가로서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언도를 받은 후에도 편지로 동료를 격려하는 등 그 열정은 식을  수 없었

 

  안 의사는 결국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한 달 뒤인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순국 당시 안 의사는 두 동생에게 유언으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고 당부했지만, 안 의사 유해는 하얼빈의거 110년이 된 지금까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 뤼순 감옥 근처에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는 우리의 큰 아픔이며 역사의 부끄럼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 및 마지막 편지와 순국 

 

 

 

 

▲그는 갔으나, 그의 정신을 기리는 표적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관리하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및 수집하고 있으며,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등을 개최한다.

 

 시민들의 참여형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전시 말미, 안 의사와 함께 사진을 찍는 코너가 있다. 사진을 찍으면 안 의사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단지(손가락을 자르다)' 서명이 담긴 안 의사의 온라인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데 그 안에는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그대의 발걸음이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글도 있다.

 

 기념관 밖 광장에는 1970년에 첫 건물 준공 때 세운 높이 3m의 안중근 의사 동상을 비롯하여 안중근 의사의 어록을 새긴 돌비들이 세워져 있어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앞뜰을 장식하고 있는 어록비와 동상

 

◎ 관람정보

주소 : 서울 중구 소월로 91 (남대문로5가 471)

관람료 : 무료

운영 시간 : 10:00 ~ 18:00 (동절기엔 17:00), 월요일, 1월1일, 설당일, 추석당일 / 월요일이 공휴이면 개관하고 다음 날 휴관

전화 : 02-3789-101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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