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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고종이 환궁했던 덕수궁과 고종의 길

by 혜강(惠江) 2019. 6. 16.

 

 

덕수궁과 고종의 길

 

고종이 환궁했던 덕수궁과 고종의 길

 

 

·사진 남상학

 

 

 며칠 전 친구들과 덕수궁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었고, 이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침 덕수궁을 입장하는 시간에 덕수궁 장문에서는 왕궁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고 있었다.

 

 

▲덕수궁의 정문격인 대한문,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고쳐 불렀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어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중화문, 고종 황제의 정전으로 드나드는 문

 

 

▲중화전. 경운궁의 정전은 원래 즉조당이었는데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중화전을 지어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은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석조전(위)과 국립연대미술관 덕수궁관(아래)

 

▲함녕전,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인 동시에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을 접견하던 장소

 

 

 

◎ 관람안내 ◎

 

►매표 및 입장시간 : 09:00 ~ 20:00

►관람시간 : 09:00 ~ 21:00

►휴궁일 : 매주 월요일

►관람료 : 성인-개인 1,000원, 단체 800원 / 소인-개인 500월, 단체 400원

 65세 이상 무료

기타사항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관람은 별도로 인터넷 사전예약

- 덕수궁미술관을 이용자는 덕수궁의 관람권과 미술관의 관람권을 별도 구입

 

 

 

 

고종의길,

 

구한말 아픔의 역사를 되새기는 길

 

 

 

▲고종의길 안내도(덕수궁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수궁 후문을 따라 미국 대사관저, 구세군 중앙회관 쪽으로 걷다보니 왼쪽에 ‘고종의 길’이라고 표시된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문을 들어서기 전 안내판을 보니,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라고 한다. 서울에 살면서도 언제 이런 길이 생겼는지 신기하여 그 문으로 들어섰다.

 

 

▲고종의 길 입구 

 

 

▲고종의 길 :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할 때 사용했던 길

 

 좁은 문과 양쪽으로 폭 3m의 담벽이 이어진 구부러진 길을 따라 빙 둘러서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조선시대 임금들의 신주를 모신 선원전 복원 현장이 나온다.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우리나라 소유의 토지가 되면서 그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한 것이다.

 

 왼쪽의 높은 담장 안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와 조선저축은행 사택은 여전히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고심 중인 우리의 처지를 드러내 보이는 느낌이다. 

 

 

 

미대사관저 쪽으로 담이 쳐져 있다.

 

 미국 대사관저를 옆에 두고 옛 러시아 공사관 터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우리나라의 비운의 역사를 상징한다.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갔던 길이라고 한다.

 

 

 

 

 

 

 

▲정동공원에 설치된 고종의 아관파천 관련 게시물

 

 

 구한말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이기자 조선을 대륙 침략의 근거지로 삼았다. 불안은 느낀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와 독일 등 삼국이 간섭에 나섰다. 일제는 즉각 반발했고, 경복궁에서 친러파 민비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단발령을 실시하는 등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사상을 심기 시작했다. 이에 민중은 크게 반발해 전국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났다.

 

 이 기회를 틈타 러시아는 무능한 황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아관)으로 피난하도록 했다.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아관파천은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 임금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파천(播遷)'은 임금이 본궁(本宮)을 떠나 다른 곳으로 난(亂)'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러시아는 다시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파천직후 개화파 김홍집 등은 참수형을 당했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은 외롭고 슬픈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정동공원 한켠에 한국 카톨릭수도원 자리였다는 표지석도 서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하는 1년 동안 간혹 아관에서 몰래 덕수궁을 드나들었으리라. 그 길이 최근에 새로 조성돼 일반에게 공개된 '고종의 길'이다. 실제로 고종이 그 길을 걸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 공관으로 피신해야 했던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구한말 격랑에 휩싸였던 우리 역사는 다 아는 바대로 강대국들 틈에 끼어 이도저도 못한 채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아픈 역사다. 이 길에 서면 무능했던 조선왕조의 몰락의 순간이 떠오른다.

 

 이 길을 끝까지 가면 정동공원을 지나 옛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진다. 한때 정동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던 화려했던 옛 러시아공사관은 모두 허물어지고 지금은 전망탑 부분만 남아있다.

 

 

 

▲옛 러시아공사관에 남아있는 전망탑.

 

 

 1990년 러시아와 재수교를 한 뒤 러시아가 이곳에 대사관을 지으려고 했지만 바로 앞에 대사관저가 있는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1년여 만인 1887년 2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새로 거처를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의 길은 피난의 길이자, 새로 황제에 오르는 길이었던 셈이다. 이런저런 역사적 의미를 새기다 보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구러시아공사관 표지판

 

 

 러시아공사관 전망탑에서 내려오니, 오른쪽 지역이 옛 경기여고 자리다. 그 자리는 본래 선원전 영역으로 지금 복원 중에 있다. 덕수궁 돌담길도 복원되었으니 덕수궁 주변이 하루 빨리 옛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덕수궁 및 선원전 복원도

 

 

◎ 관람안내 ◎

 

► 화요일 ~일요일(월요일 비공개) 9:00~18:00(입장마감 17:30)

동절기(11월~2월) : 09:00 ~ 17:30 (입장마감 17:00)

하절기(3월~10월) : 09:00 ~ 18:00 (입장마감 17:30)

► 입장료 없음

이 길은 문화재 구역으로 관련 규정에 따라 반려동물 입장과 자전거 등 운동기구 소지가 제한된다.

► 문의 : 02-771-995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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