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기념관과 효창공원
대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정신
글․사진 남상학
▲효창공원 내의 백범김구기념관 전경
백범김구기념관(白凡金九記念館)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1876년~1949년) 선생의 삶과 사상을 널리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2년 10월에 개관한 기념관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운동장 서편, 효창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진입로 양옆으로 3.1절 100주년을 기념하여 달아놓은 태극기를 따라가면 처음 맞이하는 것은 효창공원의 정문인 창렬문(彰烈門)이다. 이름을 보아 이곳이 애국선열 묘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효창공원의 정문인 창렬문
먼저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 창렬문으로 입장하지 않고 안내표지판을 따라 기념관으로 향했다. 2002년 10월에 처음 개관하였다는 기념관은 깔끔하고 웅장하게 보였다. 내가 국어교사로 재직할 당시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을 학생들에게 열강하던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 글에서 느꼈던 김구 선생의 면모가 그대로 떠올랐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야?”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에서
얼마나 절실하였으면, <나의소원은 완전한 자주독립>을 세 차례나 강조하였을까? 이 글 속에는 김구 자신이 <대한의 완전한 독립>에 대한 신념과 결의에 차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관 1층 바로 안 중앙에 마련된 백범 홀에서 김구 선생의 좌상(坐像)을 보는 순간 그 모습에서 그 결기가 엿보이는 듯했다. 사방 벽면을 전혀 꾸미지 않은 공간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입은 굳게 다문 채 나를 지켜보는 눈길이 준엄하게 책임을 묻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백범 뒤에 걸려 있는 태극기 역시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해 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좌상
중앙홀 왼편으로 돌아서면 전시관 입구가 보이는데, 백범의 ‘나의 소원’ 중 일부가 적혀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는 백범의 ‘나의 소원’을 지나면 그의 일대기와 역사적 사건을 정리한 ‘상징홀-연보’가 이어진다. 백범은 크게 5가지 활동을 펼쳤다. 이어 영상실, 유년기, 동학 의병활동, 치하포 의거, 구국운동 등의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백범김구 선생의 글 <나의 소원> 중에서
▲백범 김구의 연보 앞에서 학생들이 노트를 꺼내들고 메모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각 부문에 걸친 활동
2층에는 동선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19~1932), 김구의 가족(백범일지), 김구와 한인애국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32~1939), 추모의 공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39~1945), 한국광복군, 광복과 남북분단, 남북협상, 서거, 백범일지 등의 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도 활약했다.
▲광복군 조직표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남북협상에 주력한 김구 선생의 활동
특히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후 1928년부터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범일지 상권은 고국에 있는 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형식으로 집안의 내력과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중심으로 쓴 글이고, 하권은 그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의열투쟁, 즉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중국 내륙으로의 피신생활과 해방되기까지 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백범일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1997년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백범일지
▲'백범일지'와 '나의 소원' 그리고 김구 선생의 친필
전시관의 모든 공간마다 그와 관련된 사진, 문서, 영상물 등 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백범의 삶과 사상은 물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일별할 수 있다. 여기서,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출생과 활동 을 정리해 본다.
▲백범 김구 선생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임시정부는 국내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경무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약 3년여 동안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주요 인사를 보호하고 일제밀정을 찾아내 설득하거나 처단하면서 임시정부를 수호하였다.1923년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선출되었다. 국무령에 선출된 김구는 우선 임시정부 개편에 착수하여, 1927년 국무령제를 국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면서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힘썼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했으나 미국은 미군정을 확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친일세력과 민주주의 세력,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권력경쟁 등 갈등과 대립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자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고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이루었다.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했고 완전자주독립노선을 주장했으나, 결국 1948년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되지만 김구는 지속적으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과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했다.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고,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김구 선생의 서거는 그 후 많은 의혹에 싸인 채 세월이 흘렀으나 서거 후 40여년 만에 이뤄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뇌부에서 면밀하게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차원의 범죄였음이 밝혀졌다.
▲백범 김구는 서거 후에도 계속 전국민의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깝게 거인을 잃었다는 침울함을 안고 기념관을 나와 열린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 백범 김구의 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정남향으로 앉은 묘지 앞에는 “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白凡金九之墓”라는 비석이 있고, 묘 앞에 상석이 있었다. 상석 위에는 선생이 그토록 소원했던 <완전한 독립>이 올려 져야 함에도 아직 우리는 분단의 현실인 것이 너무나 서글프다.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백범김구지묘"라 쓴 비석과 김구 선생의 묘
계단을 내려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허묘(虛墓)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이 잠든 ‘삼의사묘(三義士墓)’가 나란히 자리 잡은 묘역을 참배했다. 1946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주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마친 분들로 이 유해를 일본에서 모시고 와 문효세자의 묘* 자리에 안장했다. 한편, 중국 다롄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감옥 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허묘 형태로 두었다.
▲안중근 의사의 허묘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이 잠든 ‘삼의사묘'
삼의사묘를 참배하고 내려서면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이봉창의 동상은 백범 김구 외에 효창공원에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을 보듬게 한다.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봉창 의사 동상
또한 효창공원 내에는 임정요인인 이동녕 선생, 차리석 선생, 조성환 선생의 묘역도 있다.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주석 이동녕,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 후 서거한 조성환 선생을 동남쪽 언덕에 안장함으로써 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 따라서 공원 내 의열사(義烈祠)에는 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이봉창의사 등 독립운동가 7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의열사 전경, 이곳에 독립운동가 7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와 같이 효창공원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이 잠든 ‘삼의사묘’가 있다. 아직 비석도 세우지 못한 허묘일 뿐이지만 이미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있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 독립운동가의 묘지를 만든 백범 김구 또한 효창공원에 묻혔다. 우리에게는 ‘효창운동장’으로 익숙한 효창공원은 이렇듯 독립운동의 성지다. 백범김구기념관을 비롯하여 효창공원을 함께 둘러보면 나라를 위하여 애쓰다가 서거한 선열들의 높은 뜻을 느낄 수 있어 현장체험학습장으로 더욱 뜻 깊게 이용할 수 있다.
▲현재 효창공원 안에는 광복 70주년기념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효창공원은 본래 효창원이었다. 효창원은 조선조 제22대 정조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의 묘소 자리였다. 그 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 및 숙의박씨의 소생 영온옹주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이 되었다.
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의 울창한 수림이었는데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구나 광복 후에는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를 홀대하는 정책에 따라 효창공원 안의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속의 연못 및 섬 등이 없애고 그 자리 일부에 효창운동장을 개설함으로써 그 규모가 더욱 축소되었다.
■ 여행정보
※전화 :02-799-3400
※관람시간 : 10시~18시(3~10월), 10시~17시(11월 ~2월),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관람료 : 없음
※가는 길 : 지하철을 이용하여 가려면 효창공원앞역(6호선, 경의중앙선) 1번 출구에서 도보 11분, 공덕역(5호선, 6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7번 출구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버스 400번(대한노인회/국민은행 효창동지점 하차), 마포17번(원효사, 백범김구기념관 하차)
▲가는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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