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120년 탑골공원의 어제와 오늘 (1897~2018)

by 혜강(惠江) 2019. 1. 9.

 

 

120년 탑골공원의 어제와 오늘 (1897~2018)

 

 

 

  탑골공원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꿈이 담겨있다. 18세기 북학파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부국강병을, 고종은 자주독립의 제국을 꿈꿨다.


  1919년 3월 1일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1960년 4월 시민들은 독재자의 동상을 끌어내리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산업화와 IMF라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 이제는 노년층의 안식처가 된 이 곳. 광복 73주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압축된 타임슬립의 공간, 탑골공원을 돌아봤다.

 

1. 조선 (1392~1897)

2. 대한제국 (1897~1810)

3. 일제강점기 (1910~1945)

4. 대한민국 (1) (1948~1960)

5. 대한민국 (2) (1960~) 

 

 

1. 조선 (1392~1897)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대원각사비, 석재유구

 

 탑골은 유서 깊은 땅이다. 고려 시대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조선 세조는 이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라는 더 큰 사찰을 개창했다. 도성 안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하지만 후대 연산군은 이곳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방(妓房)으로 바꿨다. 중종은 아예 사찰을 헐어버렸다. 폐사가 된 자리엔 대리석을 깎아 만든 하얀 탑만 덩그러니 남았다. 높게 솟은 백탑(白塔)은 도성의 명물이 됐고, 이 지역은 탑골이라고 불렸다.

 

 조선 후기 북학파 지식인들은 이 탑골에서 회합을 했다. 탑골에 살던 박지원을 중심으로 이덕무ㆍ유득공ㆍ홍대용ㆍ박제가 등이 어울리며 ‘백탑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주자의 학설을 무조건 추종하는 대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외쳤다.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며, 부국강병을 꿈꿨다.

 

 

▲19세기 한양전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서울 무관들의 연희를 담은 탑동연첩

 

 

 <열하일기> 등을 남긴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

 

 

2. 대한제국 (1897~1810)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

팔각정

 

 “700년 전에 세워진 대리석 파고다가 있는데 이것은 서울에서 가장 더럽고 좁은 지역의 집 뒤뜰에 몰래 감추어져 있었다. 모든 부분이 조각되어 있는데 평탄한 부분의 조각에 매우 정성을 들였다. 내가 마지막에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정교한 조각을 부수어 조각을 팔고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도성에 제국에 걸맞은 공원을 두려 했다. 1899년 3월부터 측량으로 공원 조성이 시작됐다. 백탑과 원각사비 주변 주택들이 대대적으로 철거됐다. 보상금을 놓고 주민들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공원의 명칭은 파고다. 불탑을 가리키는 서양식 표현(pagoda)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백탑이라는 발음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파고다 공원은 일반 백성의 휴식 공간이 아니라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파고다 공원의 팔각정에서는 황제를 모시며 호위하는 부대인 시위군악대가 연주했다. 매주 목요일 서양인과 정부 관료에게만 공개됐다. 하지만 고종이 그렸던 ‘제국의 꿈’은 불과 10년 만에 무너졌다.

 

 

▲광무 7년(1903) 11월 기와공사 중인 팔모정

 

 

▲1906년 8월 팔모정과 군악대 사이에 육모지봉의 초정(草亭)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둘러싸고 있는 1892년 모습

 

 

▲1906년 10월 열린 '광무10주년 기념연주' 후 주요 인사와 시위 군악대들

 

 

 

3. 일제강점기 (1910~1945)

3·1 운동, 광복의 꿈

음악당

 

 “탑동공원은 (서울) 북부 조선인의 유일한 공원이다. 기미년(3ㆍ1운동) 후에 당국의 미움을 받아서 금고에 처한 사람 모양으로 후문의 봉쇄를 당하고 원내 수목화초 등도 별로 보호치 안이하며 소제(청소)까지 안이하야 일반의 불평이 다대하더니…” (1926년 5월, 『개벽』69호)

 

 탑골공원 팔각정은 3ㆍ1운동의 출발점이다. 1919년 3월 1일 학생 대표가 이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3ㆍ1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은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탑골공원은 민족정기의 상징이 됐다.

 

 총독부는 일본인 식당 청목당(靑木堂)에 탑골공원 부지를 대여해, 공공장소의 기능을 제한했다. 또 1926년 순종 서거를 계기로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용산 조선군사령부가 이곳에 임시 사령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의 언론ㆍ지식인들은 ‘탑골(파고다)공원’을 하나의 기호ㆍ암호로 사용하며 일본에 저항했다. 예를 들어 채만식은 『종로의 주민』이란 작품에서 탑골공원(3·1운동), 종로경찰서(탄압), 화신백화점(민족 자본)을 주요 공간으로 등장시키며 역사적 경험을 환기했다. 식민지 현실에 좌절한 청년들은 이곳을 거닐며 울분을 달래기도 했다

 

 

▲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을 출발해 대한문으로 향하는 군중들

 

 

▲ 6·10 만세운동에 대비해 탑골공원 주위를 경비하는 일본 군인들

 

 

▲ 서울을 소개하는 사진첩에 실린 탑골공원의 모습

 

 

▲ 탑골공원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즈를 취한 시인 이상

 

 

 

4. 대한민국(1) (1948~1960)

독재의 꿈, 민주주의의 꿈

이승만 동상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이 국부로 모셔지기를 바라며, 탑골(파고다) 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4ㆍ19 혁명 일주일 뒤인 4월 26일, 성난 군중들은 탑골공원으로 몰려가 이승만 동상에 철삿줄을 걸어 끌어내렸다.

 

 이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면서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7년 후 그 자리엔 3ㆍ1운동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동상이 세워졌다.

 

 “군중 몇 명은 ‘파고다(탑골)’ 공원에 섰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끌고 (종로) 네거리를 지나갔고 군중들은 “이제 끝났구나”하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1960년 4월 27일, 동아일보)

 

 

▲1956년 탑골옹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1960년 4월 28일 시민들에 의하여 끌어내려진 이승만 동상

 

 

 

5. 대한민국(2) (1960~)  

근대화와 찾아온 재정비

아케이드, 만해 한용운 대선사, 의암 손병희 동상, 3·1운동 기념탑, 3·1운동 기념 부조, 삼일문,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호 유리막)

 

 “4일 하오 「파고다」공원 중수 공사가 「파고다」공원 경내에서 기공됐다. 현재 2「미터」의 울타리가 3층으로 높아지고 벽에 33 명인의 동상을 새긴다. 울타리 밖은 「아케이드」로 개조되며 종로도서관이 헐린다.” (1967년 4월 5일 자, 중앙일보)

 

 1967년 탑골공원은 종로 최대의 상업지구로 변모한다. 공원 내에 지상 2층의 상가 건물, ‘파고다 아케이드’가 들어섰다. 공원의 절반 이상을 말발굽 모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파고다 아케이드’는 ‘반도 조선 아케이드’ ‘신신 백화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아케이드형 상가로 자리 잡았다.

 

 파고다 아케이드는 1983년 철거됐다. 사적지의 경관과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아케이드에 있던 악기점 등은 대부분 낙원상가로 옮겼다. 90년대 종로 상권이 위축되고 IMF 외환위기가 겹치며 탑골공원은 노년층의 전유 공간이 됐다.

 

 한편 1999년 서울시는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 등으로 훼손되는 원각사지10층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가로 8.4m, 세로 8.4m, 높이 15.4m의 유리막으로 덮어 씌웠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서울의 명물인 석탑을 제대로 즐기기 어려워졌다는 시민들의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1967년 4월 탑골공원 중수 준공식

 

 

▲1967년 탑골공원을 둘러싼 아케이드 모습

 

 

▲탑골공원인근을 둘러싼 아케이드를 위에서 본 모습

 

 

▲19665년 5월 19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제막식

 

 

 

성역 VS. 쉼터

 

 “24일 오전 11시 40분쯤 서울 탑골공원. 점심 무료급식 시간이 다가오자 금세 평소보다 2∼3배 많은 600∼700명으로 불어났다. 급식표를 받아든 노인들은 100명씩 길 건너 ‘사랑채’라는 무료급식소에서 한 끼를 해결한 뒤 사라졌다.
(2000년 12월 24일, 국민일보)

 

 

햇볕을 피해 팔각정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노인. 권혁재 기자

 

1998년 2월 탑골공원 무료 급식행렬 [중앙포토]

 

▲탑골공원에 앉아 오후를 보내고 있는 노인. 김지아 기자

 

▲오후 5시 무렵이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탑골공원을 떠난다. 권혁재 기자

 

 IMF 외환위기는 탑골공원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바꿨다. 일자리를 잃은 가장과 집에서 눈칫밥을 먹게 된 노년층이 이곳으로 모였다. 탑골공원을 출발해 종로 3가ㆍ종묘공원까지, 노인들의 거대한 ‘실버 벨트’가 형성됐다.

 

 서울시는 2001~2002년 탑골공원 성역화 작업의 일환으로 공원 내 음주·가무와 장기ㆍ바둑, 이야기 모임 등을 금지했다. 이에 노인들은 대거 종묘공원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2007년 종묘공원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자, 노인들은 다시 탑골공원으로 돌아왔다.  이를 두고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 못지않게 “노년층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도심 공간이라는 가치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있다.

 

 “도시란 평범한 소시민들이 창조적이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미국 시러큐스대 존 쇼트 교수,『인간의 도시』저자)

 

 

<출처> 중앙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