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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베트남, 필리핀, 인니, 말레이

후에 여행(1) :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황궁인 후에 성(城)

by 혜강(惠江) 2019. 2. 6.

 

후에 여행(1)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황궁인 후에 성(城)

 

- 응오 문, 태화전, 현음각 등

 


글·사진 남상학

 

 

 

코트코(Cot Co)로 알려진 37m의 후에성 깃발 탑

 

 

 

  오늘은 다낭에서 평화의 도시 후에(Hue)에 가기 위해 다낭에서 7시 40분 버스로 출발했다. 후에는 북쪽의 수도 하노이에서 540㎞, 남부 최대 도시 호찌민에서는 약 640㎞ 떨어진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다낭에서 후에까지의 거리는 약100㎞. 2시간~2시간30분이 걸린다. 하루 일정으로 후에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일찍 서둘러야 했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다. 후에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 국가이자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로서 왕궁과 왕릉 등이 많은 역사 유적이 자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와 같은 고도다. 응우옌 왕조는 후에를 거점으로 중남부 지역을 통치했는데, 1945년 하노이가 수도로 승격되기 전까지 후에는 줄곧 베트남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3세기에 걸쳐 13대 왕이 거쳐간 후에는 곳곳에 역사의 자취를 남겼지만, 지난한 현대사를 지나오며 많은 부분 훼손된 상태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남과 북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왕도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하지만 당시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이들 왕궁 등 응우옌 왕조의 유적들은 후에 구시가지에 있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후에 왕궁을 보리기 위해 가는 길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도중에는 2005년에 개통된 하이번 터널(Hải Vân Tunnel)이 있다. 길이가 6.28㎞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다. 이 터널의 설계와 시공은 일본과 미국, 베트남, 그리고 대한민국의 합작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터널로 인해 후에와 다낭 사이의 거리가 20㎞는 줄어들었고, 차량의 운행 시간도 30분 이상 단축되었다니 얼마나 고마운 터널인가.

 

  왕궁에 다 왔다는 안내인의 말에 창밖을 보니 3층으로 된 높은 기단 위에 펄럭이는 국기가 예사롭지 않다. 직감적으로 왕궁이이라는 것을 쉽게 알려준다. 37m의 깃발 탑이 황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언뜻 스치는 모습에서 기단 위에 거대한 대포의 포신이 보였다. 이 대포는 왕궁을 수호하려는 강인한 의지의 상징으로 왕궁과 왕국의 평화와 안녕을 상징한다고 한다.

 

 

후에 가는 길에 통과하는 길이 6.28㎞의 하이번 터널

 

 

후에 왕궁

 

 

  18세기에 축조됐는데 정문 망루의 포대부터 위용을 뽐낸다. 외성 한 변의 길이만 10㎞에 달하고 해자와 내성이 겹겹이 에워싼다. 중국 유교사상을 축조에 반영한 것인데 우리의 경복궁(14세기 축조)과 중국의 자금성(16세기) 구조와 흡사하다.

 

 후에 왕궁은 1802년부터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마지막 왕조 응우엔 황가의 궁궐 역할을 했다. 응우옌 왕조가 통치하던 3세기, 약 200년 동안 총 13대의 왕이 살았던 곳이다.

 

 1802년 시작된 응우옌 왕조는 1804년부터 왕궁 건축을 시작했는데,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쌓았다. 해자로 둘러쌓은 후에 왕궁은 가로세로가 각각 2㎞이고 높이가 5m인 요새이자 궁전으로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자금성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여 '리틀 자금성'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화려한 색감을 사용한 건물들에 남은 전쟁의 상흔을 채 정비하지 못한 모습에서 후에의 지나온 역사의 아픔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전동차로 바꿔 탔다. 왕궁 안이 너무 넓어서 왕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전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높은 성벽 앞에 해자(성의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 물을 채워 넣어 만든 연못)가 보였다. 외부의 침입을 철저히 막았기 위한 수단일 터이다.

 

 

▲멀리서 바라본 황궁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응오 몬, 황궁에 들어서다.

 

 

▲황궁 약도

 

 

 우리는 해자를 지나 후에 황궁의 정문인 응오 문(Ngọ Môn, 午門)으로 간다. 카이딘 황제 때 재건되었다고 한다. 3층으로 된 문인데, 높이는 4.2m나 된다. 1층은 석재로 되어 있고, 2층과 3층은 목조 기와집이다.

 

  문은 전체 규모가 웅장한 이 문은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고, 황실을 상징하는 노랑색 사기기와 지붕이나 누각 내부는 정교한 목공예로 이루어져 있다. 세 개인데, 모두 닫혀 있다. 노란색 문은 왕, 그 옆 양쪽 문은 대신, 외곽 쪽의 두 문은 일반 신하가 통행했다고 한다. 문 위의 누각은 황제가 군대를 사열할 때 내려다보거나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상을 하사하던 장소라고 한다. 지붕은 봉황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응오 몬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면 연못 좌우를 가르는 중도교(中道橋)라 부르는 돌다리를 건넌다. 다리 양 단에 4개의 돌기둥으로 세워 통로를 3개로 나눈 모양이다. 태화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패방을 두 개 지나야 한다. 첫 번째 패방에는 ‘정직탕평(正直蕩平);이라고 썼다. 두 번째 패방에는 ’고명유구(高明悠久)‘라고 썼다. 황제의 정직함에 치우침이 없고, 총명함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위풍당당한 응오 몬

 

▲태화전으로 들어가는 중도교(中道橋) 옆의 연못

 

 

 

자금성을 모델로 만든 태화전

 

 다리를 건너면 좌우에 용으로 조각된 세 개로 나눠진 계단이 보이고 양 옆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사납게 보이는 신화 속의 동물 기린 상이 보인다. 이 제 계단을 오르면 응우엔 왕조 힘의 상징이었고 영고성쇠를 함께 해온 태화전(太和殿, Dien Thai Hoa)의 앞마당인 대조원(大朝院)에 이른다. 우리나라 근정전 앞 같이 좌우에 문관과 무관을 위한 품계석이 나란히 있다.

 

 1805년에 만들어진 정전인 태화전은 자금성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태화관의 규모는 들어 설 때 본 외성이나 오문의 규모를 생각할 때 소박하다. 그 이유는 청나라의 속국이어서 3층 지붕 구조를 가지지 못하고 2층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태화전의 지붕은 황제를 상징하는 금색의 기와를 얹었고, 용이 지붕 중앙과 끝머리에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붉은 색으로 빛나게 칠한 후 금박으로 무늬를 낸 기둥이며 천장에 닿게 기둥 사이를 잇는 패널이 현란하게 장식되어 있다. 기둥 위 벽에는 오언절구 형태의 '태평신제도(太平新制度) 춘풍만제도(春風滿帝都)' 라는 글이 적혀 있다. ‘제도를 새롭게 하여 태평성대를 만들고, 봄바람이 제국의 수도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옥좌는 입구 중앙 벽 쪽으로 꼼꼼하게 용을 세겨 만든 금빛 덮개 아래 위치해 있다.

 

 태화전은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중심 전각으로 현재의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총 면적은 1,300km이며 중앙당의 길이는 43.3m, 높이는 30.3m에 달한다. 태화전은 두 개의 당으로 나눠지는데 후방 중앙으로 황제가 앉았던 옥좌가 있다.

 

 태화전 뒤뜰에서 좀 벗어나면 황제 가족과 그 들을 시중드는 이들만 머무는 신비하고 고귀한 금역 지역인데 모두가 사라진 채 썰렁한 빈터만 남아 있다.

 

 

 

 

길이 43.3m에 이르는 태화전, 가까이에선 쉽게 잡히지 않는다.

 

▲태화전으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태화전 내부

 

▲태화전 앞뜰에서 바라본 응오 몬

 

 

 그 외에도 태화전 뒤뜰 좌우에 일정(日精), 월영(月英)이라 쓰인 또 다른 패방이 있고, 태화관에서 머지않은 곳에 건물 두 채는 문신과 무신이 각각 대기하던 곳으로 국사 논의 및 연회, 무술 경연들이 있었던 곳이다. 이 밖에도 황실극장으로 이용하는 열시당(閱是堂)과 왕립도서관이었던 태평루(太平楼) 등 건물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월영(月英)'이라 쓰인 패방

 

▲열시당 내부

 

▲왕립도서관격인 태평루

 

 

▲황제를 보좌하는 왕궁 후원의 기관들

 

 

현임각과 세조묘

 

 

 왕궁 안에는 총 5개의 사원이 있는데, 2층 목조 건물인 현임각(顯臨閣, Hien Lam Cac)은 세조묘와 함께 응유엔 황제들을 기리는 태묘의 대표적인 전각으로 황제가 조상들에게 제례를 올리던 일종의 사당이다. 현임각은 응우옌 왕조를 창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현임각 앞에 9개의 청동솥이 있다. 각 세발솥은 4천 년 이상 된 중국의 전통을 따라 인, 장, 영, 의, 순, 선, 우, 현 등 세상 만물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세발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크기가 클수록 왕권이 안정되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청동 솥은 각기 다른 문항과 그림이 새겨져 있다.

 

 

 

황제가 조상들에게 제례를 올리던 현임각

 

현임각 앞에 있는 9개의 청동솥

 

 

 

 현임각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우리의 종묘 정전에 해당하는 세조묘(世祖廟)가 있다. 이곳은 는 응유엔 황조 역대 황제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건물은 전통적인 동양 기와집 형태지만, 지붕과 벽체에 타일을 사용했다. 응유엔왕조는 초대 지아롱 황제부터 13대를 이어졌다.

 

 

 

 

 

우리의 종묘 정전에 해당하는 세조묘

 

 

▲세조묘 현판과 내부

 

 

  3층 건물인 종루(鍾樓)는 후에 황궁에서 가장 높다. 마당에는 대형 일산(日傘)과 제상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가끔 의식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행되는 태묘제례악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종루

 

 

 전동차 덕분에 넓은 황궁을 땀을 흘리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관람할 수 있는 것은 좋았으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으며 구석구석을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황궁 밖으로 나오니 오토바이 물결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황궁 입구에는 사람과 차들이 뒤섞여 혼잡하다. 우리는 이제 후에 도심을 떠나 티엔무 사원을 보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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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사진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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