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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 문수성지(文殊聖地), 적멸보궁(寂滅寶宮)

by 혜강(惠江) 2018. 7. 10.

 

오대산 상원사

 

문수성지(文殊聖地), 적멸보궁(寂滅寶宮)

 

 글·사진 남상학

 

▲상원사로 오르는 돌계단, 위 건물이 상원사 현판이 걸린 누각이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는 강릉지역을 오고갈 때 여러 차례 들른 적이 있으나 월정사 위쪽에 자리 잡은 상원사는 오래 전에 한 번 다녀온 후로는 최근에 가본 적이 없어 이번 강원도 여행길에 상원사 일원을 탐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장맛비가 계속되는 날씨였지만 오히려 덥지 않아 그런대로 좋은 여행이 되었다.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오대산은 우리나라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완만하게 이어져 있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이다. 오대산의 이름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등대산 다섯 개의 큰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 설과 동서남북 중대 다섯 개의 암자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찍이 명산으로 꼽히던 오대산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산(聖山)이다. 신라 시대부터 불교가 시작되어 불교의 성지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석가모니의 진골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고, 월정사와 상원사가 있으며, 적멸보궁을 수호하는 관암암(東臺)·수정암(西臺)·지장암(南臺)·미륵암(北臺)·사자암(中臺) 등이 있다. 

 

 

▲ 오대산 등산로

 

 상원사는 위 다섯 개의 봉우리가 감싸고 있는 깊은 계곡의 위쪽에 있고, 그 아래쪽에 월정사가 있다. 월정사는 신라 때 창건했으며 모양이 정교한 8각 9층 석탑(국보 제48호)과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39호)이 있다. 이곳에서 약 10㎞ 상류의 비로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는 문수보살상(국보 제221호)을 모시고 있는 국내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또한 상원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이 있다. 오늘 답사코스는 상원사와 사자암, 적멸보궁이다.

 

 

▲ 선재길, 월정사에서 계곡을 따라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숲길

 

 오대산 월정사에서 계곡을 따라 상원사로 이어지는 10km의 숲길은 선재길이라고 불린다. ‘선재’라는 이름은 문수보살의 깨달음을 좇아 구도자의 길을 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선재동자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서 모범적인 구도자로 등장한다. 예부터 스님들은 선재길을 걸으면 ‘참된 나’를 찾고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갈 수 있는 수도의 길이라 여겼다.

 

 선재길은 계곡을 가로지르며 걷는 완만한 길이다. 지금은 상원사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선재길은 도로를 살짝 비껴가며 숲길로 이끈다. 일주문부터 시작되는 1㎞ 남짓의 전나무 숲길은 80년이 넘은 전나무 1,800여 그루가 명상을 하듯 다소곳이 늘어서 있고, 그 숲 사이로 부드러운 길이 펼쳐진다. 1960년대 말 도로가 생기기 전부터 많은 스님과 불교 신도들이 왕래했으며, 화전을 일구며 살던 이들의 애환이 담긴 길이기도 하다.

 

 

▲ 일주문부터 시작되는 1㎞ 남짓의 전나무 숲길

 

 차분히 펼쳐지는 고요한 선재길에선 자작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만날 수 있다. 나란히 이어진 오대천 계곡을 여러 번 가로지르며 거슬러 올라간다. 출렁다리, 목재다리 등 다양한 형태의 길과 다리가 이어져 있고, 곳곳에 화전민 터, 옛 산림 철도 등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숨결이 거칠어질 틈 없는 완만한 길은 체력이 약한 사람도 언제든 품어 준다. 지친 도시인들을 위한 보약 같은 길이 바로 선재길인 셈이다. 선재길 중간 지점의 오대산장은 쉼터 역할을 한다. 숲길은 상원교와 출렁 다리로 이어지다 어느새 상원사에 다다르며 끝난다.

 

 선재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기 좋은 길이다. 스스로와 대화하며 ‘참된 나’를 찾아가거나,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평소 털어놓지 못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알맞다. 오대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이어지는 선재길 윗자락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호)이 있는 상원사로 이어진다. 상원사는 문수동자상과 관대걸이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걷는 거리 : 10km (월정사 일주문~상원사)

• 걷는 시간 : 3시간 30분 (적멸보궁 왕복 두 시간 별도)

• 걷는 순서 : 월정사 일주문 또는 월정사 매표소~월정사 전나무 숲길~월정사~선재길 계곡 구간~상원사 버스주차장~상원사

 

 

 

 

 

▲ 선재길에서 만나는 출렁다리, 섶다리, 오복산장과 계곡

 

상원사의 창건과 역사

 

 상원사 입구의 오대산국립공원 상원사탐방지원센터를 방문하면 게시물과 팜플릿을 통해 상원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 오대산 등산로 입구, 상원사 입구에 있는 상원사탐방지원센터

 

탐방센터에서 한 탐방객이 게시물을 찬찬이 들여다보고 있다.

 

 상원사는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9㎞쯤 떨어진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으로 향하는 산록에 좌정하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한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절에서 시작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면서 상원사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고려 말 상원사는 극도로 황폐해 있었는데,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상원사는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집과 목욕소를 만들었으며, 태종은 이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상원사를 중창하게 하여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친히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고, 뒤를 이어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았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상원사는 1946년 선원 뒤에 있는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화마에 휩쓸려 전소되는 화를 입었으나 이후 1947년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떠서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로 중창하였다.

 

 다행히 상원사는 6·25전쟁의 와중에서 월정사 등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의 노력에 힘입어 전화를 면했다. 이로써 상원사는 오대산의 정기와 함께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로서 문수전을 비롯하여 선원인 청량선원, 승당인 소림초당, 종각인 동정각, 영산전 등의 당우와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전국에서 불자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다. 

 

▲ 상원사 탐방지원세터에 걸린 자료 

 

▲상원사 만화루에 게시된 상원사의 역사 벽보

 

▲ 상원사 가람 치도

상원사로 오르는 길

 상원사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는 ‘오대산 상원사(五臺山上院寺),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라고 쓴 돌비가 서있다.

 

 

 

   입구 왼쪽, 상원사 돌비 맞은 편 길가에 세조가 냇가에서 목욕할 때 의관을 벗어 걸어 놓았다는 관대걸이(冠帶-)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에 즉위한 세조가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났고, 질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상원사 탐방은 세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서려 있어 여행을 더욱 흥미롭게 해 준다. 상원사로 오르는 길은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도열하고 있어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해준다. 바닥을 돌로 깐 길을 타박타박 잠시 걸어 오르면 상원사로 노르기 직전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부도밭으로 향한다.

 

▲ 관대걸이와 설명판, 세조가 냇가에서 목욕할 때 의관을 벗어 걸어 놓았다고 한다.

 

▲ 상원사로 들어가는 길, 흙길이었으면 어떠했을까?

 

부도밭의 세 스님

 

 부도밭에는 상원사의 오늘을 있게 한 세 분의 스님이 세상의 분주함을 그치고 적멸에 들어 있다. 방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 그리고 만화 스님이다.

 

 방한암 스님(1876~1951)은 경허, 만공, 수월 스님 등과 더불어 근세의 선풍을 다시 일으키신 것으로 유명하신 스님이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적의 군사 거점이 된다 하여 상원사를 불사르려 할 적에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이니, 법당과 함께 소신 공양하겠다"하여 절을 끝내 지켜냈다.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탄허 스님은 불교 경전의 최고봉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등 수많은 불전을 번역하신 역경의 선구자셨다.

 

 1919년 평북 덕천에서 태어난 만화당 희찬 대선사는 6.25 때 조실인 방한암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남아서 방한암 선사의 좌탈입망을 지켜보았던 효가 돋보이는 스님이다. 다년 간 월정사 주지로 있으면서 6.25 전쟁으로 소실된 전각을 복구하는데 진력한 스님이다.

 

부도밭. 좌로부터 방한암, 탄허 스님, 희찬 스님의 순이다

 

 

돌계단을 올라 만나는 문수전

 

 상원사로 오르는 길은 왼쪽 큰 길로 오를 수도 있고, 오른쪽 돌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본래 ‘좁은 길’이라는 생각에 왼쪽의 편한 길을 버리고 오른쪽 가파른 돌계단으로 오른다. 30여 개가 넘는 돌계단은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다. 이름 그대로 번뇌 등 잡념을 버리고 묵묵히 오르면 ‘천고(千古)의 지혜(知慧), 깨어있는 마음’이 되어 상원사란 현판이 걸린 2층 누각이다.

 

 상원사의 현판은 탄허 큰스님의 글씨다. 천정의 벽화인 문수보살 36화현도(文殊菩薩三十六化現圖)가 화려하고 장엄하다. 화려한 천장화에 감탄하며 누각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면 상원사 중심 법당 문수전(文殊殿)과 석탑이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만나는 5대서약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다.

 

▲ 계단을 오르기 전에 만나는 조각들

 

상원사로 오르는 돌계단

 

▲ 힘겹게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번뇌가 사라진다.

 

▲ 상원사 누각, 상원사의 현판은 탄허 큰스님의 글씨다.

 

▲ 옆에서 본 2층 누각

                                                

 

▲ 누각의 천정에 그려진  문수보살39화현도

 

문수전 안의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

 법당 문수전(文殊殿)은 ‘‘ㄱ’자형 건물이다. 현판 ‘文殊殿’ 글씨는 예서의 모양으로 쓴 것이다. 근처 중대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기에 대웅전이 따로 없다는 것도 상원사의 특징으로 문수전이 대웅전에 해당하는 건물인 셈이다. 

 

 

 

 

▲ 법당 문수전과 그 현판

 

 문수전 안에는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을 비롯하여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신라 때부터 이어온 오대산 문수신앙에 조선의 왕실 배경까지 더해진 상원사 법당에 봉안돼 있는 국보 제221호 목조문수동자좌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제작된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의 앞과 옆모습

 

 

 몸의 종기로 고생하던 세조는 오대천에서 문수보살인 동자승이 등을 밀어준 덕에 몸이 깨끗해졌고, 이에 감격한 세조가 그 모습을 목각상으로 만든 것이 문수동자상이라고 한다.

 

▲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와 문수보살상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복장 유물이 나왔고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년)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가 분명한데다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드문 사례라 조선 전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佛身普邊諸大會(불신보변제대회, 부처님의 몸은 모든 곳에 두루 계시고), 充滿法界無窮盡(충만법계무궁진, 법계에 충만하사 다함이 없으시며), 寂滅無性不可取(적멸무성불가취, 적멸하여 본성이 없어 취할 수 없건마는), 爲求世間而出現(위구세간이출현,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하셨네), 如來功德不思議 (여래공덕부사의, 여래의 공덕은 불가사의하시며), 衆生見者煩惱滅 (중생견자번뇌멸, 중생들 보는 자는 번뇌가 다 사라지네)” 주련(柱聯)을 읽어보고 내려서니 고양이 석상이 보인다.

 

▲ 문수전의 주련 

 

 고양이 상(像)

 

 문수전 앞에 동물 형상의 석상이 있다. 고양이 석상이라고 한다. 세조와 얽힌 설화가 전한다고 한다. 세조가 상원사에 참배를 하려고 법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어의를 물고 놓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겨 법당 안을 살펴보니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서 자객을 찾아내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고양이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했다고 한다. '공양미'라는 말도 '고양이를 위해 바치는 쌀'의 뜻을 가진 '고양미'가 바뀐 것이며 ‘묘답’이 이때 생긴 말이라고 한다. 이 삭상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마모가 심하여 물개의 형상처럼 보인다.

 

▲ 세조의 목숨을 건지게 했다는 고양이 상

 

영산전과 석탑

 

 영산전(靈山殿)은 선원 뒤쪽에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인 ‘靈山展’ 현판 글씨도 활달한 행서로 되어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영산전 앞에 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기존의 방식을 떠난 것으로 10개 정도의 돌을 쌓아올린 것인데, 전체가 심하게 훼손되어 원래 모양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으나 이 탑에는 희미하게나마 불상들과 함께 구름, 용, 꽃들도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돌과 돌 사이에는 탐방객이 소원을 비는 종이와 동전 들을 끼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영산전과 그 앞에 서있는 석탑

 

동정각(動靜閣)의 동종과 모방종

 

 소림초당 앞에는 동정각(動靜閣)이라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보다 45년 이상 앞서는 725년 만들어졌다. 크기는 높이 167cm, 지름91

cm,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몸을 틀고 앉아 고리 역할을 한다.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연곽(蓮廓)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종 몸체의 아래와 위 끝 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항아리 형인데 그중 가장 불룩한 부분에도 무릎 꿇고 구름 위로 하늘을 날면서 옷깃을 흩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갖춘 모본이 되는 종이다. 

 

 

▲ 소림초당 앞에 있는 동종각

 국보 제36호 상원사동종과 조의 표면에 새겨진 비천상

   상원사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동종을 보호하기 위해 모방종을 제작해 예불 등에 사용해왔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방종은 지난 수십 년간의 타종으로 인해 파음(破音) 현상이 발생안 기존의 종 대신 2007년 서산 부석사 범종과 2013년 대구 팔공산 갓바위 대종을 조성했던 경력이 있는 조각가 도학회 한서대 교수에게 의뢰하여 새로 범종을 제작했다.

  2년여 걸쳐 밀랍주조 방식으로 제작·완성된 새로운 상원사 범종은 ‘상원사봉황화엄범종’이라 명명됐다. 높이 170㎝, 지름 91㎝ 크기에 무게는 1.5t이다. 종두는 봉황으로 이뤄졌으며 종의 고리는 구름을 형상화했다. 종의 상대에는 비천과 사방불(四方佛)을 새겼고 상대에 이어 구슬을 꿴 형상의 영락장엄이 베일처럼 드리워졌으며 하대에는 십이지를 새겼다. 새 상원사종은 국보 제36호인 상원사 동종 옆에 걸려 있다. 

 

▲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과 모방종 '상원사봉황화엄범종'(사진 오른쪽)

 

상원사 봉황보당

 

 문수전 뜰에는 하늘 높이 황금빛 찬란한 ‘상원사 봉황보당’이 눈길을 끈다. 오세종 작가의 작품인 상원사 봉황 보당은 아말감도금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찬란한 황금빛을 잃지 않는 수은 도금 기법은 불교 유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보는 이들에게는 신심이 절로 우러나오게 하리라. 이 봉황보당은 세조가 상원사를 찾았을 때 왕의 상징인 어룡기를 걸어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빛 찬란한 ‘상원사 봉황보당’

   

 이 외에도 상원사 경내에는 소림초당(少林草堂)과 청량선원(淸凉禪院), 만화루(요사채), 백련당 등이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은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선원인 청량선원은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 상원사 종무소로 사용하는 소림초당

 

▲ 청량선원

 

▲ 만화루와 그 앞의 조각과 상원사 지혜수(우물)

 

사자암

 

 사자암은 오대산을 오르는 주요 등산로인 상원사·적멸보궁·비로봉·상원사 등산로 코스에 있다. 사자암은 상원사에서 자장율사가 부처님 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중대 사자암은 문수성지 오대산 적멸보궁을 외호하는 도량인 셈이다.

 

 사자암은 법당과 요사체를 함께 갖춘 계단식 5충 건물로 연건평 500평 규모다.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한 절 구조가 특이하다. 좁은 공간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기 위해 지혜를 펼친 건축물이다. 적멸보궁을 수호하는 사자암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보살로 있다. 곳 비로전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의 기도처, 교육장,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활용한다. 숨을 헐떡이며 사자암에 오르면 비로전의 비로자나불이 미소로 반겨준다. 

 

 오대산에 안긴 중대 사자암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순례길이다.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오대산은 깊으면서도 온화하다. 그래서 보는 곳 모두가 경내였다. 누군가 오대산에 들면 업장이 녹아내리기에 그 안의 생명붙이들도 화해롭게 공존한다고 했다. 실제 그렇다. 상극 관계인 다람쥐와 청설모가 인사를 나누니 화해와 상생의 공간이 따로 있겠는가?

 

 

법당과 요사체를 함께 갖춘 계단식 5충 건물로 이루어진 사자암 

 

▲ 사자암 법당 내부의 부처상 

 

▲ 사자암에서 바라본 오대산 능선

 

▲ 월정사, 상원사를 거쳐 사자암에 오른 후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적보궁으로 오른다.

 

상원사 적멸보궁

 

 사자암을 나서면 바로 적멸보궁 오르는 길이다. 사자암 아래에서부터 적멸보궁까지 돌계단이 놓여 걷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오대산 산세에서 적멸보궁의 위치는 용의 머리, 그리고 그 아래 용의 눈에 해당하는 곳에 샘이 있다. 용안수다. 용안수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자 마침내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사자암에서 10분 거리, 상원사에서 20분 거리다.(산길로 1.5km 정도)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는 전각이다.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불단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승려 자장(慈藏)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부처님 사리를 이운해 봉안한 후 지금까지 불교성지가 돼 왔다. 우리나라에는 오대산 중대 외에도 법흥사 정암사 통도사 봉정암 등 오대적멸보궁이 있다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중심인 비로봉과 주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분지 가운데 해발고도 1189m 위치해 있는데 뒤편에 봉분처럼 쌓인 언덕에 사리가 봉안돼 있고, 석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이곳의 적멸보궁은 국내 유례없는 이중건축구조로 조선전기 다포양식이 잘 유지되어 있어 건축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다포식이란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 등에 짜 맞추어 댄 구조물)를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배열한 형식을 뜻한다. 국내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내·외부 건물 모두 동일하게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중구조 형태를 가지고 있다. 적멸보궁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9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까지 불자들이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을 많이 찾는 이유는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와 세조가 친히 이곳을 방문했으니 그 영향은 감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 적멸보궁과 현판

▲ 적멸보궁의 석비

 

 오대산국립공원은 훌륭하고 다양한 관광자원도 많지만 서울·원주·강릉을 잇는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약수터의 하나인 방아다리약수가 있고 약수터로 가는 길에 전나무와 잣나무 등이 펼쳐져 있어 등산객들이 꼭 들르는 곳이 되었다. 양호한 숙박 시설, 버섯잡채를 비롯한 별미식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상원사 가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상원사에 가려면 동서울터미널에서 진부행 시외버스를 타고 진부터미널에서 내려 월정사, 상원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소요 시간 : 3시간 이내)

 

 월정사~상원사 구간을 걷는다면 월정사 일주문 입구에 내려 상원사까지 선재길로 걸어갔다가 상원사를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나와도 좋고, 반대로 상원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가 월정사로 내려와도 좋다. 버스시간을 고려한다면 상원사로 바로 들어가 월정사로 내려오는 것이 났다. 진부터미널로 나오는 마지막 버스가 월정사에서 출발하는 시간이 늦기 때문이다. 걷는 시간은 천천히 쉬면서 월정사, 상원사도 둘러본다면 4시간 정도면 족하다. 그러나 사자암과 적멸보궁까지 갔다 오려면 넉넉히 왕복 3시간 정도를 더 잡아야 한다. 

 

식사

 

 월정사 매표소 직전까지 식당이 많지만 매표소를 지나면 식당이 없으니 도시락을 지참하거나 점심 때 상원사에 도착하면 상원사에서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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