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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속초의 재해석 : 감각적 '가업(家業)' 실험, 여행 코스를 바꾸다.

by 혜강(惠江) 2018. 6. 14.

 

속초의 재해석 

감각적 '가업(家業)' 실험, 여행 코스를 바꾸다.

 

 

박경일 기자

 

 

 

사진 위는 이즈음 강원 속초에서 가장 ‘핫’한 카페인 ‘칠성조선소 살롱’의 내부. 오래된 조선소 부지 안의 사택을 카페로 개조했는데, 세월이 묻어나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평일에도 손님들이 몰려든다. 사진 왼쪽 아래는 카페 안에서 바깥을 내다본 모습. 벽에 전시된 사진 옆으로 손님들이 조선소 마당의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 아래는 전시공간 등으로 꾸며진 조선소 건물. 칠성조선소는 지난해 8월 폐업해 더 이상 배를 만들거나 고치지는 않는다.

 

 

# 속초가 좋아서 속초로 간다

   속초 교동 사거리에 치과의원이 하나 있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의원이다. ‘속초가 좋아 서울에서 온 치과의원’. 서울 마포에서 치과를 하던 최창균(51) 원장은 지난 2010년 이곳 속초로 자리를 옮겨왔다. 속초의 바다와 설악산이 좋아서 이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속초 이주를 결정하면서 개업 장소 인근의 치과의원 숫자는 물론이고 상권분석도 하지 않았다. 돈을 보고 이주를 결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속초에 매료된 것은 군 복무 대신 1994년부터 이듬해까지 속초 인근인 강원 고성에서 공중보건의로 복무했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속초는 그에게 이상향이었다.


  그렇다면 ‘속초가 좋아 서울에서 온 최 원장’은 지금 행복할까. 최 원장은 “속초로 10년째 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다른 곳으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아직 다음 여행지를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긴 하지만 지금 하는 속초 여행이 그만큼 만족스럽다는 뜻이겠다.

  최 원장의 치과는 소설가 이찬옥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단편소설 제목이 ‘속초가 좋아 서울에서 온 치과’다. 속초를 여행하다 치과병원을 찾은 중년 여성과 그를 진료하는 의사가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최 원장은 소설이 나오기 전에도, 나온 뒤에도 작가와는 교분이 없었다.

  그래도 작가는 제법 꼼꼼하게 취재를 했던 모양인지 소설 속의 병원도 똑 닮았고, 서울에서 속초로 내려오게 되는 이야기도 사실과 거의 같다. 최 원장은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책이 나온 뒤에 책을 100권쯤 사서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게 돌렸다고 했다. 아 참, 여담이지만, 강원 원주에 ‘서울이 싫어 내려온 치과’도 있다. 속초의 치과와 더불어 성업 중이다.

  속초에서 대뜸 치과 얘기부터 꺼냈던 것은 ‘속초가 좋아서’ 찾아오거나 돌아온 이들로 인해 속초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속초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이런 것들이다. 번성의 시기를 보내고 3대를 이어오는 동안 쇠락할 대로 쇠락한 낡은 조선소는 손주 세대의 가치 발견으로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했고, 속초의 이웃한 서점 두 곳은 도시에서 돌아와 대를 잇는 이들에 의해서 감각적으로 변신했다. 여인숙이 들어섰던 버스터미널 인근에는 서점이면서 찻집이면서 게스트하우스인 복합공간이 등장하고 있고, 낡은 제재소 옆에는 한 세대 전의 딱딱한 관공서를 빼닮은 당혹스러운 카페도 생겨났다. 속초에서는 기존의 낡고, 허름하고, 용도를 잃은 공간들이 젊은 세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이렇게 재해석된 공간은 젊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공간이 바뀌자, 여행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속초는 더 이상 아바이마을의 갯배나 설악산만으로는 대표되지 않는다. 더 많고 다양한 매력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장 ‘핫’한 카페…칠성조선소 살롱



   속초에 그야말로 ‘핫’한 카페가 있다. 속초의 새로운 명소를 꼽으라면 단연 첫손으로 꼽을 만한 곳이다. 요즘 여행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카페 ‘칠성조선소 살롱’이 그곳이다. 카페 이름이 왜 조선소일까. 이름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는 실제로 배를 만들었던 조선소였다.

  칠성조선소는 속초 청초호를 끼고 있다. 청초호 주변의 분위기는 독특하다. 쇠락한 주택과 새로 지은 모텔, 짓다 만 폐허 같은 건물들이 온통 뒤섞여 있다. 이런 골목 한쪽에 칠성조선소 살롱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낡은 조선소 건물이 있고, 마당에는 바다에서 배를 끌어내거나 진수시키는 데 쓰이는 레일이 있다. 레일 주변에는 배를 묶는 데 쓰이는 쇠사슬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커피를 파는 카페인 칠성조선소 살롱은 조선소 마당 옆에 있던 살림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내부는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출 콘크리트 구조. 시멘트벽은 그대로 두고 바다가 보이는 창문만 크게 냈다.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꾸밈새만으로 보면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조선소가 끼고 있는 청초호의 경관도 뭐 별로 대단하지 않다. 초록 이끼의 호수는 깨끗하다 할 수 없고, 호수 너머로는 고층아파트가 마주 보인다. 잔돌들이 깔린 마당도 황량하고, 조선소 한쪽의 조립식 건물도 생뚱맞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끊임없이 칠성조선소 살롱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열에 여덟, 아홉은 속초로 여행 온 관광객이었다. 평일임에도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밀려들던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하루 손님이 700명이 넘은 적도 있다고 했다. 한 번 다녀간 이들의 입소문이 퍼져가면서 손님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칠성조선소 살롱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마치 강력한 인화성 물질에다 불 켠 성냥을 던진 것처럼 그 불길이 걷잡을 수 없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왜 이곳까지 올까. 무엇이 손님들을 조선소로 이끄는 것일까. 조선소가 가진 독특한 매력? 한 집안이 가업으로 이어온 것들에 대한 존중? 아니면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취향? 카페 주인조차 “도대체 관광객이 왜 이렇게 많이 찾아오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짐작하건대 사람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건 아마도 칠성조선소가 지닌 진정성 때문은 아닐까. 6·25전쟁 직후에 문을 열어 한때 영화를 누리다가 이제는 경쟁에 따라붙지 못하고 뒤처져 쇠락해가는 것들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의 정서 때문은 아닐까.

 

 

속초 문우당서림의 한쪽 벽에 만들어진 ‘작은 서가’. 238개로 구획된 작은 책꽂이에는 책을 꽂는 대신 다양한 책에서 가려뽑아낸 문장을 적어두었다. 하나하나 문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싶어진다.



6.25 때 문 연 조선소, 3대(代) 거치며 공연하는  살롱이 되다.

 

# 조선소는 왜 카페가 됐을까

   칠성조선소는 1952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지금 카페를 운영하는 최윤성(38) 씨의 할아버지가 조선소 문을 열었을 때의 이름은 ‘원산조선소’였다. 고향이 원산이었던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부산까지 피란 내려갔다가 고향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운 속초 땅에 정착했다. 속초에는 함경도 실향민들이 속속 바닷가에 자리 잡고 어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원산과 남만주에서 배 만드는 일을 했던 할아버지가 속초에 조선소를 내자 배 주문이 밀려들었다. 배 짓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는지 호황도 그런 호황이 없었다. 속초의 인구가 늘고, 고기잡이가 번성했던 시절의 얘기다.


  조선소는 가업으로 대를 이었다. 1986년 최 씨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조선소를 물려받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까지 해서 자동차 회사에 취업했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조선소를 힘겹게 운영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배 만들기의 대를 잇기로 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안팎의 사정으로 조선소는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양식업이 발달하고 어업규제가 강화되면서 배의 수요는 예전 같지 않았다. 대형어선들이 득세하면서 칠성조선소가 주로 짓던 소형 선박이 설 자리도 사라졌다. 나무로 배를 짓던 칠성조선소에 가장 큰 타격은 섬유강화플라스틱(FRP) 선박의 등장이었다. 무겁고 불편한 목선을 주문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급기야 칠성조선소는 배 짓는 것을 포기하고 선박 수리공장으로 명맥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업의 쇠락을 경험한 아버지는 아들 최 씨에게 조선소를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고교 시절 밴드 활동을 했고, 대학에서는 조소를 전공한 아들도 배 만들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최 씨는 우연히 배를 주제로 한 미술작품을 만들면서 비로소 조선소에서 자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고, 급기야 미국의 랜딩스쿨에 입학해 배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배 만들기’라는 3대를 이어온 가업이 숙명처럼 그를 부른 것이었다.

  2013년 아내와 함께 속초로 돌아온 최 씨는 ‘와이크래프트보츠’라는 레저선박 브랜드를 만들었다. 아버지의 조선소 한구석에서 레저용 카누나 카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입이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레저용 선박이 한국에서 과연 시장성이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궁리 끝에 시작했던 게 칠성조선소 살롱이었다. 조선소 안의 집을 리모델링해 커피를 팔기로 한 건 조선소 공간을 관광과 결합한 매력 있는 곳으로 변신시키기 위한 첫 단추였다. 레저용 선박을 만들어 팔겠다는 생각은 일단 접었다. 대신 조선소를 가족들이 함께 찾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가족 단위 관광객을 대상으로 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보트를 탈 수 있게 해주고, 문화공연도 즐기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 됐다.

  그의 꿈에 힘이 돼준 건 한국관광공사의 지원이었다. 관광공사는 칠성조선소를 전국의 관광지를 권역별로 나눠 동선으로 연결하는 ‘테마여행 10선’의 테마 관광지로 선정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관광공사의 간섭 없는 지원은 결국 오래된 조선소가 지역 명소로 등장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달 19, 20일 이틀 동안 칠성조선소에서 성황리에 열린 뮤직 페스티벌도 관광공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 서점 두 곳이 여행명소가 되다



▲ 속초 동아서점은 독특한 책 분류가 인상적이다. ‘애주가의 서재’

코너에는 술과 안주, 그리고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책을 꽂아두었다.
    


  지방 중소도시의 작은 서점이 여행 목적지가 될까? 답은 간명하다. 된다. 희망 섞인 미래의 기대가 아니라, 지금 그렇다는 얘기다.  속초에는 서점이 있다. 그냥 서점이 아니라 ‘아늑한’ 서점이다. 그것도 여러 개다. 속초의 서점 얘기를 꺼내려면 3대(代)째 가업을 잇는 동아서점부터 시작하는 게 당연한 순서다.

  속초의 동아서점은 해방 이듬해인 1954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3대를 이어온 속초 최초의 서점이다. 서점은 제법 규모가 크다. 전체 면적이 120평에 달한다. 서점은 당초 20평 남짓의 규모였는데, 서울에서 공연기획 일을 하던 3대 김영건(32) 씨가 고향으로 돌아와 합류하면서 이곳으로 확장 이전했다. ‘서점을 해 보겠느냐’는 아버지의 전화 한 통에 고향인 속초로 내려온 그는 서점 확장과 공간 배치, 책 배열 등을 진두지휘했다. ‘더 나은 서점’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동아서점 인근에 문우당서림이 있다. 1984년에 개업했으니 동아서점보다는 많이 늦다. 지금이야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 딱 두 곳이지만, 그때만 해도 속초 시내에는 서점이 두 손으로 꼽아야 할 만큼 많았다. 동네서점의 불황이 계속됐음에도 문우당서림은 꾸준히 몸집을 키웠다. 5평에서 사직한 가게가 10평으로, 다시 15평으로, 40평으로…. 그리고 지금 서점 1, 2층 공간은 웬만한 대형서점에 육박한다. 문우당서림에서 인상적인 건 미술을 전공한 딸 이해인(26) 씨의 공간을 다루는 솜씨다.

  이 두 곳 서점에는 외지 손님이 적지 않다. 서점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다. 중소도시 서점의 책이 대도시에서 파는 책과 다른 것도 아니고,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게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것보다 비싼데 왜 외지 관광객들은 서점을 찾는 것일까. 일단 두 서점은 책을 고르기 충분할 만큼의 공간이 있다. 중소도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규모다.

  이보다 특별한 건 두 서점이 책을 분류하거나 다루는 방식이다. 동아서점은 딱딱한 분류방식이 아니라, 인문적이면서도 선명한 주제로 분류해 놓은 서가를 곳곳에 두었다. 책을 분류하는 주제 중 상당 부분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안들인데 이렇게 분류된 책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분류의 문장 자체를 메시지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런 책 분류는 김 씨의 솜씨다. 이에 비하면 문우당서림의 서가는 시각적인 면에서 특별하다. 특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다 264개로 구획된 책장을 짜 넣고, 책에서 뽑아낸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 전시해 놓은 디자인은 감각적이다. 책과 함께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 소품들의 디자인도 눈길을 끈다.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을 들르는 관광객들은 서가에서 책 냄새를 맡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만 찍고 가는 게 아니라 책을 사 가지고 간단다. 주로 팔리는 책도 여행 중인 지역의 여행 책도 실용서도 아닌 인문학 책이다. 동아서점의 베스트셀러는 ‘당신에게 말을 건다’이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동아서점의 3대 김 씨가 쓴 책이다.


# 속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바다를 보는 언덕



▲ 6·25전쟁의 와중에 지어진 속초 동명동 성당. 흰 외벽의 성당도

이색적이지만 언덕 위 성당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더 인상적이다.


    

  속초의 동명항 일대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동명동 성당이 있다. 흰 외벽이 인상적인 아담한 성당이다. 흰 조갯 가루를 빻아 만든 것 같은 성당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성당이 올라서 있는 자리다. 성당은 언덕에 올라서 있는데, 잔디를 심은 성당 마당에 서면 지붕들 너머로 저 멀리 바다가 펼쳐진다.

  동명동 언덕 위 성당 마당에서 보는 경관은 기막힌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감탄의 조망은 아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부드럽고 순한 바다 풍경이 거기 있다. 관광지에 세워놓은 인공미 넘치는 전망대라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종류의 풍경이다.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은 아니지만 오래 두고 보고 싶은, 그런 경관이다. 단언하건대 속초에는 이제 이런 바다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더 이상 없다. 그러니 가보시라 할밖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좀 서둘러 달라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성당 언덕 앞에 곧 30층이 넘는 주상복합건물 3개 동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동명동 성당과 이웃한 속초감리교회가 바다 풍경을 막아서는 고층빌딩 건축을 막기 위해 함께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동명동 성당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관은 시한부의 풍경이다.

  동명동 성당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국 공병대의 지원으로 건축되기 시작해 휴전 바로 다음 달인 1953년 8월 건립됐다. 속초 지역에서 60년 넘게 원형이 그대로 보전된 수복지구 유일의 건축물이다. 전쟁통에 지었다는 성당이 어쩌면 이리도 새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모습일까. 풍경은 낭만적이지만, 성당은 북부 동해선 철로를 잘라다가 철근으로 삼고, 수송부대의 드럼통을 잘라 펴낸 것을 지붕으로 올려 지어진 것이다. 동명동 성당에서 기도를 올린 이들은 대부분 전쟁통에 이북에서 내려와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들이었다. 그들은 전란을 피해 잠깐만 떠나 있고자 했던 고향 땅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이 성당에는 고향 땅을 가고자 했던, 생이별의 가족과 만나고자 했던, 간절한 기도와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었다.


# 동명동의 추억에 덧붙이는 수다

 


    

  이쯤에서 수다 몇 마디를 보탠다. 동명동 성당이 지어졌을 무렵인 1953년 속초에는 가수 고복수가 아내 황금심과 함께 다방을 차려 살고 있었다. 반도악극좌의 공연에서 만난 열 살 아래의 황금심과 결혼한 고복수는 늘 아내와 악극단 공연을 함께 다녔다. 1953년 휴전이 조인되기 직전에 속초 지역의 군부대 위문 공연에 왔던 고복수 부부는 그 길로 속초에 잠시 눌러살았다. 고복수의 노래에 심취했던 대령계급의 군인 한 명이 그들 부부를 붙잡아 두고 속초 시내에 다방을 차려주며 생계를 이어가도록 해줬던 것이었다. 대령의 고복수 부부에 대한 배려는 대중스타를 향한 지금의 열광적인 ‘팬심’을 능가한다. 군인도, 가수도 모두 다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이건 대단한 배려였다.

  고복수 부부는 다방을 하면서 밀주를 담가서 내놓았다. 밀주는 돈벌이가 아니라, 장교들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직접 정성껏 빚은 것이었다고 전한다. 양곡이 귀하던 시절, 밀주는 장교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속초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간 고복수는 1958년 서울의 ‘시공관’에서 은퇴공연을 했다. 은퇴 후 고복수는 손대는 사업마다 모두 실패해 고달픈 말년의 삶을 살았다. 각종 전집물을 판매하러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서적 외판원까지 했던 그는 197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악극단 공연으로 평생을 떠돌았던 고복수는 울산 출신이다. 울산 중구의 그가 태어난 집 인근에는 ‘청춘 고복수길’이 조성돼 있다.

 

 

<출처> 2018. 6. 13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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