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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이탈리아

이탈리아 콜로세오(콜로세움)와 개선문

by 혜강(惠江) 2018. 5. 26.

 

이탈리아(7) : 콜로세오, 개선문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사진  남상학

 

 

 

 

 

웅장한 규모의 콜로세오(원형경지장)

 

 

 

  이탈리아 남부 여행을 마친 우리는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하여 로마 일원의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3,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일찍이 세계의 중심지였다.

 

  중세, 르네쌍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유럽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로마는 대부분이 구릉지대로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영원의 도시’로 불리는 로마는 아탈리아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특히 바티칸은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물질적 중심지로서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 이유로 도시 전체가 옛 유물들과 교회, 궁전, 분수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어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만하다.

 

  그 대표적인 곳으로 바티칸 박물관을 비롯하여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로마의 공회장이었던 포룸, 트레비 분수, 바티칸박물관과 대성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 등이다.

 

 

 

 

로마의 주요 관광지 약도

 

 

 

 

  먼저 찾아간 곳이 콜로세오(Colosseo). 흔히 콜로세움으로 불린다. 콜로세오는 이탈리아 로마를 상징하는 원형극장이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콜로세오의 엄청난 크기에 놀란다. 직경이 긴 쪽은188m, 짧은 쪽은 154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며, 외벽의 높이는 57m로 4층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고, 출구가 80개나 된다. 그리고 한꺼번에 5∼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다. 그러나 콜로세오는 어쩌면 오늘 날 전 세계 축구 경기장의 원형 모델이 되었을 법하다. 

 

  그러면, 이 엄청난 크기의 거대한 원형극장 콜로세오는 언제 누가 무슨 용도로 만들었을까? 그 역사는 AD72년 전으로 거술러 올라간다.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72년에 시작해 그의 아들 디투스 황제가 80년에 완성하였다.

 

  티투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10만 명의 노예를 데리고 와서 그들을 콜로세오를 만드는데 투입했다. 콜로세오는 이처럼 노예들의 피와 눈물과 땀으로 8년 만에 완공되었다.

 

 

 

콜로세오의 상상도

 

 

 

  이 원형경기장의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었는데, 현재 이름 ‘콜로세오’로 불리기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근처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 도금상인 클로소(Colossus)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의 ‘코로살레’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콜로세오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주로 국가적 행사나 중요한 모임 외에 주로 검투사의 대결, 그리고 검투사와 야생동물관의 대결로 볼거리를 제공했다. 맨 아래 층은 로얄석, 2층은 기사 계급, 3층은 일반 서민, 4층은 노예를 포함한 천민 계급으로 구분하여 관람했다.

 

  이들은 모두 치열한 격투 끝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경기를 보며 흥분했고, 열광했다. 경기장 바닥은 항상 피로 물들었다. 권력자는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노예를 부렸고, 지금도 그렇듯이 스포츠는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에 충분한 매체인 것처럼 민중의 통합을 위하여 적절한 이용되었다. 

 

 

 

 

콜로세오 주변에 세워놓는 콜로세오에 대한 해설판  

 

 

 

  그런데 이 콜로세오는 지금 큰 틀의 원형만 유지하고 있을 뿐, 곳곳에 흩어진 많은 대리석의 잔해들과 함께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15세기부터 약 3세기동안 로마의 집권자들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건물을 지으면서 필요한 자재들을 이 콜로세오에서 뜯어갔기 때문이다. 무식하게도 채석장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된 콜로세오를 보기 위해 매년 6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넓은 벌판 위에 앙상하게 서있는 돌덩이 유적을 찾아가는 이유는 콜로세오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의미를 찾기 위함일 것이다.

 

  역시 그곳에는 권력자의 음모가 담겨 있고, 그들의 과시적인 무한 욕망을 이루는 일에는 민초들의 엄청난 희생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콜로세오를 관람하고 나오면 바로 옆에 서있는 것은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다.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이벌이었던 막센티우스와 벌인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315년(가톨릭 공인은 313년)에 착공하였는데 그 후 지진으로 방치되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1804년에 복원한 것이며, 개선문에 붙어있는 부조물들은 로마 유적지 중에서 제대로 보존된 것들을 끼워 붙인 것이다.

 

  이 개선문은 지금도 프랑스 파리나 혹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개선문 형태의 원형이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비롯해 평양의 개선문, 서울의 독립문 등의 할아버지 격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파리에 개선문을 세울 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고, 이후 다른 나라의 개선문들은 모두 이 양식을 본떠서 만들었다.

 

  하지만 규모면에서는 이곳의 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파리의 개선문처럼 꼭대기에 올라갈 수도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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