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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에서 다산(茶山) 선생의 흔적을 찾다.

by 혜강(惠江) 2017. 11. 24.


강진


다산초당에서 다산(茶山) 선생의 흔적을 찾다.


글·사진 남상학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1.0km의 오솔길은 부담 없는 트레킹 코스다. 동백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도암만 풍경은 고즈넉하고, 대나무와 차나무와 동백나무 어우러져 있어 사색하며 걷기에 더 없이 좋다. 백련사에서 차밭과 동백숲길을 지나 산길을 지나면 다산초당에 이른다. 이 길은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만나기 위해 오가던 길이다. 다산초당 주변에도 동백나무가 많다.




좌측에 자라고 있는 것이 백련사 차밭이다.




실학사상의 산실,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불려가 문초를 받았으나(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별다른 혐의가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잠시, 신유사옥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조선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55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이에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이미 1786년에 사망)가 주축을 이루었던 벽파(僻派, 정조의 탕평정책에 의한 한 정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벽파와 대립하였던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며,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을 언급하였는 바,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등이 사형 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 정약용 등은 귀양을 보내고 박해로 피해를 입은 자의 수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정변의 피해자였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 자는 학래)의 집에서 기거했다.


 강진 주막집에서 4년,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산이 만덕산 기슭의 초당으로 처소를 옮긴 것은 해남 윤씨 가(家)의 호의로 이루어졌다.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산간정자였다.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는 조선 3재의 한 분으로 꼽히던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다시 저 유명한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니, 귤동마을 해남 윤씨 집안은 다산의 먼 외가 친척들이었다.





 귀양살이가 여러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尹文擧, 자는 규로)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의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쯤을 이 다산초당에서 지냈다.






다산초당, 초당이지만 1075년 강진군에서 보수할 때 기와로 올려 와당이 되었다. 


 정약용은 이곳에 전부터 있던 윤단의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다성각이라고도 함)을 짓고 주로 동암에서 기거하며 “천여 권의 책을 쌓아 놓고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동암을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했다. 서암은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이 차와 벗하며 밤새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불렀다. 동암과 서암의 가운데에 있는 다산초당은 주로 교실로 썼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1818년 9월 유배 생활이 끝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학문을 탐구했고, 고을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경세유표』『흠흠신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다산초당이 실학사상의 산실로 여겨지는 이유다. 

 

 유배는 강제로 세상에서 격리되는, 그래서 가혹한 형벌 중 하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세상과의 격리는 때론 하나의 일에 전념하게 하여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완성하게도 한다. 다산은 이 가혹한 유배생활을 통해 낳은 학문적 업적으로 세상에 크나큰 정신적 유산을 남긴 것이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8년 복원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이다. 원래 초가였던 것을 복원할 때 매년 짚을 갈아주는 번거로움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올리는 바람에 ‘와당’이 되어버려 ‘초당’의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없지만 곳곳에 다산의 체취가 남아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아 지금은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5년 강진군이 다산초당을 보수할 때,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도 복원하였다. 우측의 '다산동암'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좌측의 '보정산방'은 추사 김정희의 집필을 모각한 것으로, '다산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동암(송풍암)은  주로 정약용이 사용하였으며 학문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던 곳이다. 




다산초단 서편에 있는 서암(다성각), 이곳은 주로 제자들의 유숙처로 사용했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이 솔방울을 지펴 찻물을 끓이던 뜰 앞의 평평한 바윗돌인 다조(茶竈), 다산이 직접 수맥을 찾아 찻물로 쓰던 초당 왼편 뒤쪽의 약천(藥泉), 뜰 오른쪽의 아담한 연못은 다산이 직접 축대 쌓고 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흙을 쌓아 꽃나무도 심고 물을 끌어 폭포도 만들었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초당 뒤쪽의 선생이 해배될 때 썼다는 정석(丁石)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이 네 가지를 일컬어 ‘다산4경’이라 한다.



위로부터 다산4경으로 불리는 다조, 약천, 연지석가산, 정석바위


천일각, 형제를 그리는 마음


 다산초당에서 좀 떨어진 동쪽 산마루에 천일각이란 정자가 있다. 천일각은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 간 둘째형 약전(若銓, 1758년~1816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곳이다. 천일각은 ‘하늘 끝 한 모퉁이’란 뜻으로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정약전은 조선 영조에서 순조 연간에 살던 성리학자·생물학자 정약현(丁若鉉)의 동생이며, 정약종·정약용의 형이다.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정약전은 유배생활 중 남도의 어류를 분석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삶으로 실현하였다.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모습을 다산은 천일각에 앉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흑산도로 귀양 간 둘째형 약전과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누각


유난히 차를 사랑했던 다산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들어오면서 생활의 안정을 얻어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본격적인 차 생활을 즐겼다. 차를 즐겼던 다산에게 차나무 많은 만덕산은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차나무가 많은 강진 귤동 뒷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정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의 ‘차사랑’은 백련사 스님이었던 혜장선사로부터 시작된다.


 다산이 백련사 혜장스님에게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하며 올린 걸명소(乞茗疎)에는 다산의 차 사랑과 여유가 돋보이고 있다. 그리고 “새 비가 내린 귤 숲은 자못 아름답구나/ 바위샘물을 손수 떠서 차병을 씻네./ 약 절구질 잦아지니 번거로운 곰팡이는 없건만/ 드물게 달이는 차 풍로엔 먼지만 있네” 다산의 글에 나오는 ‘바위샘물’은 초당 뒤꼍에서 솟아나는 약천(藥泉)이었을 것이다.. 이 옹달샘은 1808년 다산이 손수 파서 만든 샘으로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셨으며, 담도 삭이고 묵은 병도 낫게 했다 하여 ‘약천’이라 불렀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면 나타나는 차밭, 다산은 유남히 차를 좋아했다.


일행 중 우남일 교장이 차밭을 가리키고 있다.  


정약용의 제자 윤종진의 묘


 다산초당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주변이 어둑어둑하도록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여기서 좀 더 내려오면 완만해진 오솔길 가에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이 길에는 나무의 뿌리가 땅 밖으로 드러나 근육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산초당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반질거리는 곳도 있다. 친절하게 여기 정호승의 시 한 편을 적어 세웠다. 숨을 돌리며 시 한 편 읽고 가라는 뜻이려니 생각하며 잠시 발을 멈췄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 " (정호승의 '뿌리의 길'에서)






 시 한편을 읽으며 숨을 돌리고 나서 제법 긴 비탈을 한동안 내려오노라면 길가에 무덤이 하나 보인다. 이는 다산초당의 주인 윤단(尹慱)의 손자이며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尹鍾軫, 1803~1879)의 무덤이다.


 1808년, 정약용이 처음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윤종진은 당시 여섯 살 꼬마로 초당 강학의 끝자리에 끼어 앉아 형들과 함께 글공부를 시작해 다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그를 위해 <순암호설(淳菴號說)> 외에 몇 편의 증언을 친필로 따로 써주어 그를 분발시켰다.


 다산이 그에게 준 증언은 윤종진의 6대손인 윤영상 선생이 소장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안에 제목 없이 실려 있다. 첫머리에 다산초당의 4경을 노래한 ‘다산사경(茶山四景)’ 시가 실려 있고, 이어 몇 편의 증언을 잇달아 수록했다. 모두 다산의 친필이다. 다산은 체격이 작은 윤종진에게 대인의 뜻을 품고 노력하라고 독려했다. 다산이 막내 제자 윤종진에게 ‘순암(淳菴)’이란 호를 지어주며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윤종진의 묘비에는 세월의 각질을 보여주는 이끼가 푸르다. 지금은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동자석 두 기가 말간 얼굴로 무덤 앞을 지킨다. 더 정겨운 것은 묘를 지키는 문인석이다. 그 아기자기한 표현이 딱딱한 문인석의 모습의 아니다. 마치 어린 동자 같은 모습이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다신계 찻집과 윤동환 선생


 묘에서 내려오면 귤동(橘洞)마을이다. 세상 따라 이 마을도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이 오래 전 다산이 머문 한적한 시골마을의 고적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 길가에 찻집이 하나 있다. 찻집의 이름은 다신계 전통찻집. 찻집은 무허가 건물처럼 을시년스럽게 보이지만, 그 뒤로는 고풍어린 기와집이다. 찻집은 강진군수를 지낸 윤동환(尹棟煥·65) 씨가 운영하고 있다.


 1952년생 윤동환은 민선 3기로 강진군수를 지낸 기간을 제외하곤 평생을 초당 밑에서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에게 초당을 내준 윤단이 그의 6대조이며 다산의 열여덟 제자 가운데 막내이며, 다산초당 바로 밑에 묻힌 윤종진이 4대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초당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고, 대학 때는 본격적으로 다산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그의 학문과 인격에 심취했다. 평생을 다산의 연구에 매진한 그는 <삶 따라 자취 따라 다산 정약용>, <다산의 생애와 사상> 등 관련 저서들을 다수 펴냈다.


 해남 윤씨 가문의 집 입구에는 ‘다신계(茶信契)’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다신계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에 인연을 맺은 18명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모임으로 해마다 모여 햇차를 만들어 마시며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이 같은 다신계의 뜻과 의미를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그는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찻잎을 따던 나무에서 해마다 찻잎을 거둬 첫물차를 내리고 이를 다산의 영정 앞에 올린다. 남은 차는 다산의 후손에게 보냄으로써 다신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신의(信義)'를 오늘날까지 지켜가고 있다.


 윤동환은 다산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스스로에게 다심(茶心)이란 호를 붙였다. 다산이 꿈꾸었던 목민관(牧民官)을 실천하기 위해 강진 군수를 지내기도 했지만, 1985년 다산초당 가는 길 입구에 '다산문화진흥원'도 열고 강연회 등에서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그는 지금 다산의 제자들이 결성한 다신계(茶信契)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진흥원 앞에서 평일 300~400명, 휴일이면 500명이 넘는 관람객을 위해 다산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윤동환 선생이 귀양살이를 끝내고 생가로 돌아간 다산이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다산 제자의 후손인  윤동환 선생인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왼쪽부터 강상대 이사, 우남일 교장, 윤동환 선생, 오용환 교장, 필자 남상학) 




다산의 유물을 전시한 다산유물전시관


 한편, 다산초당과 700m쯤 떨어진 곳에 다산유물기념관이 있다. 1999년 8월 개관한 다산유물기념관은 연건평 409㎡로 1~2층에 걸쳐 전시실, 다목적 홀, 체험교실, 자료실, 사무실, 뮤지업샵, 카페테리아 등이 있고, 소장품 192점의 소장품을 갖췄다.


 전시실에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였다. 만남 / 생애 / 환생 / 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정약용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생활, 유배생활, 해배 이후의 저술활동 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그에 따라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수원 화성(華城)을 축성하는 모형과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도 눈에 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영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상영되도록 되어 있어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는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탁본체험, 다산명언청자체험 등이 그것이다. 전시관 뒤편 왼쪽에는 다산 수련원이 있고 그 앞 광장에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다.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다만, 월요일이 공휴일일 때에는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평일에 휴관한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단체 1,000원), 청소년 1000원(단체 500원), 어린이는 500원(단체 300원)이다. 경로는 무료.





• 여행정보


련사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 061-432-0837

다산유물전시관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 061-430-3911

다산초당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 061-430-3911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2.5km의 오솔길은 꼭 30여분 정도 부담 없는 트레킹 코스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 다산유물전시관은 숲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백련사와 다산초당의 출입로가 다르기 때문에 차량을 가지고 온 사람은 답사 순서를 정할 때 세 곳 중 주차하기 가장 편리한 백련사를 먼저 관람한 후 차량으로 다산 유물 전시관으로 이동하여 주차하고 기념관을 먼저 관람한 후 만덕산 숲길을 이용하여 따라 다산초당 입구로 이동하는 것이 수월하다.


교통 :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2번국도→18번국도(해남 방향)→1.5km→학명리(좌회전)→4km→백련사 입구→1km→다산초당 입구. 서울서 5시간 소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호남선)에서 강진행이 하루 13회 운행. 5시간20분소요.


숙식 : 강진 한정식은 강진만 갯벌과 탐진강, 그리고 주변의 들녘에서 구한 온갖 재료로 만든 요리를 푸짐하게 내는 것이 특징이다. 해태식당(061-434-2486), 명동식당(061-433-2147), 동해회관(061-433-1180)  등 유명한 식당이 많다. 다산초당 아래 귤동마을에 민박집이 두어 곳 있다. 강진 읍내엔 프린스장(061-433-7800) 등 숙박시설이 많다. 


해태식당에서 내놓는 한정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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