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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재, 다산 정약용이 강진 첫 유배지에서 학문의 꿈을 펼치다

by 혜강(惠江) 2017. 12. 2.

 

강진 사의재

 

다산 정약용이 강진 첫 유배지에서 학문의 꿈을 펼치다. 

 

 

글·사진 남상학

 

 

 

복원된 다산의 강진에서의 첫 유배지 '사의재' 

 

  

 다산 정약용의 전남 강진 유배기간은 18년간의 세월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시기에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무려 500권에 이르는 대 저술을 남겨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뒤를 이은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이들은 원래는 모두 경기도 남한강 하류에 근거를 두고 살았던 경화사족의 공통점을 지니며 이른바 실학에서도 그 특성상 후기의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와는 다른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일파를 이루었다.

 

정약용의 강진으로의 유배

 

 강진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불려가 문초를 받았으나(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다) 별다른 혐의가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이미 1786년에 사망)가 주축을 이루었던 벽파(僻派, 정조의 탕평정책에 의한 한 정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신유사옥이다.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이 1801년(순조 1) 2월 체포되어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이승훈·홍낙민 등과 함께 순교했다. 박해로 피해를 입은 자의 수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 정약용 등은 귀양을 보냈다.

 

 

다산의 유배길

 

 

다산, 주모를 만나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1801년, 더욱 핍절하게 강진으로 와서 유배의 세월을 보낸다. 정약용은 총애를 받고 승승장구하던 정조의 사망 후에 그의 형제들과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가히 멸문지화의 상황에 처하여 있었다. 유형원은 그의 부친 유흠의 옥사로 인하여 벼슬에 대한 뜻을 거두고 우반동으로 낙향하지만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참으로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다행스러운 참혹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의 형제 중 하나는 이미 처형된 상태였고 형인 정약전과 동생인 정약용이 동시에 유배의 길에 올랐다가 강진에서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약도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멀고 먼 바다 건너 흑산도로 떠나가는 형인 정약전과 눈물로 이별을 나눈 후 사실상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1801년, 중죄인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정변의 피해자였다. 다산은 천주학쟁이 곁에 갔다가 치도곤을 칠 줄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다산에게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어느 주막을 운영하는 늙은 노파 하나가 오막살이 주막집의 뒷방을 내어 주어서 어렵게 거처를 마련했다. 이따금 주막집 노파가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노파가 다산에게 “어버이 은혜가 같다고는 해도, 저 보기에는 어미 수고가 훨씬 큰데 어째서 조선 땅에서는 성씨도 아비를 따르고 상복도 어미는 가볍게 입습니까? 너무 치우친 것은 아닌가요?”고 물었다. 다산은 “아비는 나를 낳아준 분이 아니냐? 그래서 옛 책에서는 어미은혜가 깊기는 해도 천지에 처음 나게 해 준 은혜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답을 한다. 그러자 노파는 “쇤네 생각으론 말씀입지요. 푸나무로 치면 아비는 씨앗이고, 어미는 땅일 텐데 씨 뿌리는 것이야 힘들 게 뭐 있느냐? 씨앗을 품어 움 틔우고 꽃 피우며 열매를 여물게 하는 것은 모두 땅기운이지만, 생김새는 모두 씨앗을 따라가니, 옛 성인이 예(禮)를 그리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요.” 한다. 화들짝 놀란 다산은 ‘몸으로 살아내며 얻은 슬기라는 것이 이리도 놀랍구나. 내 공부가 헛되다.’ 싶었다고 한다. 다산은 노파와 피운 얘기꽃을 흑산도에 있는 형 정약전에게 쓴 편지 글에 적바림했다.

 

 주막이 동문(東門) 밖 우물 옆에 자리한 탓에 날마다 아낙들의 소리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오가는 술손님들의 주정도 다반사였다. 사계절을 한 바퀴 돌아 그 소음과 풍경에 서서히 익숙해질 무렵, 다산은 주막집 뒷방 한 칸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끊임없이 못살게 굴던 현감도 갈려 가고 아전들의 경계하는 듯한 눈빛도 한층 누그러진 차였다.

 

 

 

사의재 안에는 선비의 생활에 최소한의 물건이 갖춰져 있다.

 

 

 이에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려 깊은 주막집 노파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후학이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약용에게 있어서 강진은 유배길에 오른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특권적인 여건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강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근 해남에 고산 윤선도의 솔거지가 정약용의 외가였기 때문에 그는 얼마든지 그 집안의 귀한 서적과 수많은 전적들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머슴이 다산이 원하는 서적들을 해남 외가에서 강진까지 라오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니 이 같은 여건은 정말 다산의 학문적 활동을 위해서는 다시없이 유배라고 하는 불행한 상황 속에서 너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다산이 첫 거처를 정한 동문주막

 

 

다산의 첫 제자 황상(黃裳)

 

 다산은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 훈의(訓義)를 주교재로 이곳에서 4년간 거처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다산은 그 작고 허름한 서당에서 강학의 열정으로 귀양살이의 적막함을 이겨내려 했다. 이때 처음 받아 가르친 제자가 더벅머리 15세 소년 황상(黃裳, 1788~1870)이다.

 

 

 

다산이 제자 양성을 위해 저술한  「아학편」 훈의(訓義)

 

 

 황상은 강진읍 동문 밖에서 살며 총명한 것이 눈에 띄어 열다섯 살 때부터 다산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황상이 스승에게 첫 절을 올리고 7일이 지난 1802년 10월17일에 다산은 ‘증산석(贈山石)’, 다시 말해 ‘산석에게 준다’는 표제의 짧은 글을 내렸다. ‘산석’(山石)은 다산이 지어준 황상의 자였다. 다산은 이제 막 배움을 시작하는 제자 황상에게 면학문(勉學文)을 써주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1802년 임술년 10월 17일, 강진의 한 주막에서 서로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시골 아전의 아들이었던 황상은, 이 만남으로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스승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를 평생 마음에 담고 공부에 매진했다. 황상은 다산이 18년 유배생활을 통하여 강진읍에 소재한 사의재, 고성암, 이학래의 집에서 기거한 8년여 동안을 다산과 같이 공부와 생활을 했으며 선생께서 다산초당으로 옮겨 가면서 강학 활동을 같이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황상은 봉양하는 어머니, 처와 자식들의 생활이 어려우므로 같이 가서 공부 할 수 없다 하여 농사에 전념하면서 가사를 보살폈다.

 

 

▲ 다산이 제자인 황상에게 부친 한시와 다산 정약용의 ‘면학문’을 맏아들 정학연이 다시 쓰고 사연을 적은 발문.  

 

 

 그는 1818년,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깊은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붓을 놓지 않았고, 늘그막에는 작은 집을 지어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는 특히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황상은 다산 내외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식(1836년)에 참석하기 위하여 천리 길을 걸어서 18년 동안 그리던 스승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갔으나 병중에 있는 스승을 뵙고 내려오다가 몇 일후 다산선생의 부음을 받고 다시 가서 제자의 예의를 다했다. 그 후 10년 뒤(1845년 3월) 스승의 제삿날 다시 찾아가 기일에 참석하였는데 다산 선생의 큰 아들 정학연(1783년~1859년)이 감사의 표시로 ‘정․황 계첩’을 써 주면서 두 집안은 자자손손 영원토록 형제처럼 살아가자고 약조하였다. 

 

 이 무렵 정학연과 황상은 함께 송도를 유람하면서 정학연․학유 형제와 황상사이에 남북천리로 편지와 시문이 오고 갔으며, 정학연의 주선으로 황상의 시 작품이 추사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다산 시학의 계승자였음에도 평생 강진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년에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비롯한 추사학파 인물들과 교유를 하면서 그의 이름이 서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황상은 추사로부터 “지금 세상에 이런 작품이 없다”는 극찬을 받았으며 시인으로써 존재를 중앙문단에 알리고 이후 추사 형제를 비롯한 권돈인 초의선사 허련(소치) 등 당시 문예계의 중심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추사와 일찍부터 가깝게 지내던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매개가 되었지만, 치원 황상은 다산 시학의 계승자로서 결국 만년에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당대 대가들에게서 대단한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다산의 쓴 「애절양(哀絶陽)」

 

 다산이 사의재에서 생활할 때 지은「애절양」은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다. 세도 정치가 극심해 지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삼정이 문란해졌다.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이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삼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던 전세, 군포, 환곡을 거둬드리는 일을 말한다. 이 시는 당시의 사회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양(絶陽)’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것이다. 이 시는 남자가 생식기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극적 사건을 슬퍼하는 작자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7언 20구로 된 한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 젊은 아낙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전쟁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한 일이야 그래도 있을 법한 일이로되

사내가 제 양물을 잘랐단 소리 예로부터 듣도 보도 못하였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의 이름이 모두 다 군적(軍籍)에 실렸구나.

관가에 가서 억울한 사정 호소하재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섰는데

이정(里正)은 으르렁대며 외양간의 소마저 끌어갔다오.

남편이 식칼 갈아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선혈이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부르짖길 "이 바로 자식 낳은 죄로다!"

누에치는 방안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나라 자식의 거세하던 풍속 참으로 가엾은 일이었거든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

하늘 땅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

말이나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대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부자집은 일년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이네들은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거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편을 거듭거듭 읊노라. 

 

         -출처『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권4

 

 죽은 시아버지, 남편, 막 태어난 아들까지 세 명의 군인세금을 내지 못해 집안의 큰 재산인 소를 끌고 가버려서 군청에 찾아가 하소연 하려해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지기에게 쫓겨나는 젊은 여인의 손에 들린 피 ane은 남편의 그것 아이 낳은 게 죄로구나. 양반들은 호의호식하며 잔칫상을 물리는데 백성들은 폭정에 시달려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잘라야 하는 현실을 읽으며 가슴이 져며 온다.

 

 

▲ 다산이 지은 '애절양'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 기록한 '애절양'을 지은 동기는 이렇다.이 시는 계해(癸亥, 1803)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노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만에 군보(軍保, 군적)에 올라 있어 里正(이정=관리)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하는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 자는 학래)의 집에서 기거했다.

 

 

지금의 사의재

 

 지금 사의재는 바깥채(동문매반가)를 일반음식점으로 허가하고 주막채, 사의재, 화장실, 연못, 초정, 정원 등은 꾸며 관리하고 있다. 주막집(동문매반가)는 조선실학의 대가로 거듭나게 된 데는 주인할머니의 공이 크다고 여겨 강진군에서 그 뜻을 기리고자 사의재 복원과 함께 당시 주막(동문배반가)을 재현하고, 현대판 주모와 현대판 파전, 동동주 등의 토속적은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강진군은 2015년 관광객들이 사의재에 머물러 갈 수 있도록 사의재 명소화 사업의 하나로 사의재 바로 옆에 사의재 한옥체험관을 조성했다. 대지 면적 328㎡에 안채 1동(139㎡)과 사랑채 2동(63㎡)으로 건립했다. 사의재가 전통주막으로써의 음식과 숙박제공이라는 본래의 특성 중 숙박기능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체험관 외형은 한옥 특유의 고즈넉함과 멋을 살린 전통 한옥 형태이지만 내부는 체험객이 이용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화장실 등을 현대식으로 시공했다. 직접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 온돌방에서 숙박하는 전통 구들체험, 전통 다도체험과 유료로 운영되는 다산 체험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또 저잣거리도 조성하여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고 다산을 일으켜 세운 사의재 주모와의 이야기를 그린 다산별곡과 같은 작품의 공연, 체험프로그램 등 소프트웨어 사업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너지효과 창출을 유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청렴수련을 이 주변으로 이전하여 강진 동부권 경기를 활성화하고 있다.

 

 

강진군에서 사의재 명소화 작업으로 추진하는 사업들

 

사의재 명소화 사업의 하나로 정자, 연못, 우물 등이 재현되었다. 

 

▲ 재현된 주막(동문배반가)에서는 파전, 동동주 등의 토속적은 음식을 판매한다.

 

▲ 사의재 한옥체험관 평면도

 

 

 

 

 사의재를 돌아나오면서 정호승 시인의 시 '다산주막'을 읽어본다. 다산과 벗하고 싶은 이들에게 '다산주막'으로 가서 한 잔 술을 받을 것을 권하고 있다.

 

"홀로 술울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다산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리지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나와 잔을 내미실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여행정보>

 

주소

* 사의재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 061-433-3223

* 사의재 한옥체험관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31-5 / 061-430-3328

 

한옥마을 숙박요금(주변 복원공사 중 임시요금)

안채(청실, 홍실) 2인실 : 주중 28,000원, 주말 35,000원, 휴일 35,000원

안채(상방) 10인실 : 주중 70,000원, 주말 84,000원, 휴일 84,000원

사랑채(위채 4인실) : 주중 42,000원, 주말 56,000원, 휴일 56,000원

사랑채(아래채 6인실) : 주중 56,000원, 주말 70,000원, 휴일 70,000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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