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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강진 다산기념관,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한 눈에

by 혜강(惠江) 2017. 11. 25.



다산기념관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한 눈에

 

글·사진 남상학



강진군에서 제작한 다산의 표준 영정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700m쯤 떨어진 곳에 다산유물기념관이 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한 곳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만덕산을 드지고 남향으로 지어진 다산기념관은 강진에서 다산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개관하였다.


 2014년 개관한 다산기념관은 연건평 409㎡로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의 1층에는 전시실과 수장고, 뮤지엄실, 카페테리아가 들어섰고, 2층에는 다목적 홀, 체험교실, 전망테크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다산기념관 전경과 입구 


 

 다산기념관은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만남/생애/환생/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수학과 관료생활 ▲유배생활과 다산학단(茶山學團) ▲해배(解配)이후 저술정리 등 해당시기 별로 구성돼 있다.


 이에 따라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시실 안에 수원 화성(華城)을 축성하는 모형과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도 눈에 띈다. 다양한 다산 친필 간찰과 제자들의 유물들을 통해 강진에서 다산의 학문과 성과를 느낄 수 있다.



* 전시관람 유도를 위한 전반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관람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종합안내데스크 및 전시관련 홍보물을 비치되어 있다.



수학과 관료생활


실학자 정약용과 18제자 상징조형물

 

 ‘만남’의 코너에는 다산기념관의 상징성을 나타내는 실학자 정약용과 18제자 상징조형물이 전시되어있으며, 조형물 천장에는 별자리가 나타나 있어 관람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쉽게 다가 갈 수 있도록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다산의 생애


‘생애’ 코너에는 다산정약용선생의 전반적인 행적을 통해 다산의 삶의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연출되어 있다. 출생과 성장과정이 그의 가계와 학풍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다산의 일생에 대하여 살펴본다.
 

 다산 정약용(1762, 영조 38~1836,현종 2년)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 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열 살 때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했다. 




다산 가계도와 다산의 연표


 1777년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8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정조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된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 아래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종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배다리, 수원화성, 거중기 등 기술 관료의 면모도 보였다.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목민관의 의무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IO BOOK 영상  다산정약용선생과 성호학파의 관련 사실들을 서책모형의 내부영상으로 표현하여 천주교와 실학, 이익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다산의 모습들의 정보를 관람객이 제공받을 수 있다.



▶ 다산의 관직생활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된 다산, 정학자가 되기까지의 관직생활의 행적을 살펴볼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수십 년의 관직생활 동안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서학(천주교 신앙)문제를 빌미로 삼아 부패한 세력의 모함으로 되돌아왔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셋째 형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 형제는 평생 다시 보지 못하였다. 정약용은 40세로부터 57세에 이르는 18년 동안 남쪽 바닷가의 외진 곳에서 보냈다.


유배지 강진은 다산에게 새로운 인식과 학문을 요구하였다. 당시 민인들은 무책임한 지방관과 포악한 아전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임신만 해도 군포를 부과하고 백골이 된 조상을 세금에서 빼 주지 않았으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고, 강아지 이름을 군안에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을 참다못해 어떤 집에서는 남자가 자신의 양근을 자르는 처참한 일까지 발생했다. 세상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했다. 강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온 나라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이 정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민생현장을 목격하고 비리적발로 '민생'과 '국법' 강조하였던 암행어사, 목민의 현장에 나가서 백성을 위한 목민관 정치를 펼치고 바쁜 틈에도 학자로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활발히 했다. 



유배생활과 다산학단


정조 사후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은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켜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이루게 된다.





▶ 유배생활


 유배생활에 들어간 다산은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그 후,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 자는 학래)의 집에서 기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기슭의 초당으로 처소를 옮긴 것은 해남 윤씨 가(家)의 호의로 이루어졌다.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산간정자였다.






 유배의 길 : 우배에서부터 유배생활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다산은 강징에 유배된 후 거처를 옮겨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다산은 강진에 귀양온 후, 주막집의 방 하나를 얻어 어렵게 지내다가 혜장 스님과 만나면서 비로소 정신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혜장은 다산을 위해 고성사란 암자에 공간을 내 주었고, 이곳에서 다산은 한 동안 머물며 『주역』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교유상이 바로 이 두 종류의 『견월첩』 속에 오롯이 남아 있어, 유배 초기 다산의 생활상과 승려와의 교유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저녁 기운 빗기운을 걷어 가더니/ 개인 빛이 절 다락에 들어오누나./ 석양 비친 봉우리 누른 빛 띠고/ 바람 먹은 대나무 푸르고 여려./ 마음은 창해 따라 멀리 있는데/ 몸만은 늙은 중과 함께 하누나. / 슬프다 남쪽 바다 바라보자니/ 조수 머리 조그만 배가 보이네"


 두 사람은 마음을 나눈 벗이 되어, 서로를 아끼고 위해 주었다. 두 가지 『견월첩』을 통해 이 시기 다산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이 큰 의미가 있다.



'견월첩'은 다산 정약용과 혜장 스님 사이에 주고받은 시문과 편지를 다산이 친필로 정리한 서첩이다.



  다산초당 시절 '초당사우'를 읊은  "다산사경첩"이 있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조영했던 다산초당의 전후좌우에 있는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의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칠언율시를 행서로 쓴 것으로 정약용의 어느 필적보다도 그 의미가 깊다. 표지 제첨은 예서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茶山親墨橘頌堂珍藏)”이라 쓰여 있다. 정약용의 글씨는 초년에 전대의 명필 이광사ㆍ강세황의 서풍을 따르다가 강진 유배 이후로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이 첩은 강진 유배시절 이후의 정약용의 서풍을 볼 수 있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목민심서》는 목민관으로 부르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이다. 부임(赴任)·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 典)·진황(賑荒)·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 되어 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 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이다. 이 책은 다산이 57세 되던 해에 저술한 책으로서, 그가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 풀려난 해인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것이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이 지방관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발전을 다룬 것으로,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주요 내용은 지방의 관리로서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뽑은 것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고루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수령들이 행정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이런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목민심서는 담고 있다. 부임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법,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법,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법, 백성을 사랑하는 것, 아전들을 단속하는 법, 세금, 예절, 군사, 재판, 그리고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법, 그리고 퇴임하는 일을 기술하였다.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목민심서


화성성역
 

'위대한 다산'  화성설계를 소개하고 화성축조의 의의와 수리적 계산법, 축조 8조목 설명, 성곽의 기본시설 설치 등을 소개하고 있다. 관련유물(화성정리통고, 기중도설, 화성성역의궤)은 쇼케이스에 복제하여 전시하였다.




▶ 하피첩과 매화병제도


 하피첩은 다산이 1810년 귀양지인 전남 강진에서 제작한 글씨첩이다. 부인이 보내준 치맛감 위에 학연과 학유, 두 아들들을 위해 써내려간 편지글들을 중심으로 종이를 함께 붙여 만든 색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과 남을 위한 선행의 가치, 넉넉한 삶의 태도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원래 네 첩이었으나 한첩은 사라지고 지금은 세첩이 전한다.


 다산은 그림도 그렸다. 다산의 그림은 ‘사사로운 감정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사상가였을 것이란 우리의 통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 나는, 애틋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바로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1813)’가 그것이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그래서 ‘매조도(梅鳥圖)’라고도 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다산의 절절한 그리움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펄펄 나는 저 새가 , 우리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꽃다운 그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 왔도다.
  여기에 올라 깃들어 지내며, 우리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유배생활 13년째 되던 해 여름에 그린 이 매조도는 위쪽에 매화와 참새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시 한 편과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 있다.






다산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 하피첩과 매화병제도



 다산을 걱정하고 그리워하고 다산의 부인 홍씨의 글



▶ 다산학단의 면면들


 다산학단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키운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초당에서의 10년은 다산의 학문이 무르익던 시기.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학문적 토론도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이 시절 제자 그룹은 ‘다신계절목’에 나와있는 ‘18제자’가 중심이다. 대부분 다산초당을 제공한 윤씨 집안의 자제들이나 이유회, 이강회 등과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도 들어있다. 또 18제자는 아니지만 윤시유, 윤창모, 윤정기, 이시헌 등도 다산에게 배웠다. 이 시절 다산은 다산강학에 참여했던 제자 윤창모를 사위로 삼기도 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키운 제자들은 친척이거나 양반 자제도 있지만, 읍중 아전집의 자제들과 승려들도 있었다. 조선에서 사제 관계의 전통으로 보아 매우 특이하다. 이들은 절망과 고난의 시기에 다산 정약용과 사제의 연을 맺고 함께 역경을 딛고 희망을 써 나갔다. 다산초당은 절망을 디디고 다산의 희망주의가 피어낸 새로운 세계였다.


 유배지의 제자들은 대개 처지와 개성에 따라 학문 진로를 정하였다. 어떤 제자는 과거 공부, 어떤 제자는 경학 공부에, 또 어떤 제자는 문학이나 기술을 중점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다산학단의 중요한 학문자세와 중심 과제는 수기치인에 있었다. 다만 저술에 힘쓰기를 강조하는 스승의 모범을 따라 각자 개성적 전공으로 나갔다. 천문·농학·지리·역사·기술·외교·문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어놓고 스승의 실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다산학단은 정약용이 강진을 떠나면서 강학을 중단했다. 강진을 떠나면서 다산은 ‘다신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서로 유대를 갖고 다산을 흠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다산친필 간찰



다산의 화폭을 강진에 담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1801년 11월 22일경 강진 도착. 강진의 유배생활. 유배초기 노파의 주막집을 '동문매반가'라 일컫다가 '사의재'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하는 정약용의 모습 등)의 거처를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강진에서 다산이 그린 그림과 글


▶ 해배 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

 

해배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자신의 저작을 총정리한 『어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택은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있다. 1910년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영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상영되도록 되어 있어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는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탁본체험, 다산명언청자체험 등이 그것이다. 전시관 뒤편 왼쪽에는 다산 수련원이 있고 그 앞 광장에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다.


 기념관 인근에 있는 다산교육관 및 수련원은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정약용 선생의 실용주의 사상과 목민정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수련원 앞에 있는 ‘말씀의 숲’은 정약용 선생의 명언을 각계각층 사람들의 다양한 육필로 돌기둥에 새겨 조형화한 야외공간이다.





여행정보
주소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415)
전화 : 061-430-3912


관람 :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다만, 월요일이 공휴일일 때에는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평일에 휴관한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단체 1,000원), 청소년 1000원(단체 500원), 어린이는 500원(단체 300원)이다. 경로는 무료.


가는 길
*고속버스 : 서울↔강진 (1일:6회) 5시간 / 강진버스여객터미널 061-432-966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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