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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강진 백련사, 동백 숲 반짝이는 천년고찰

by 혜강(惠江) 2017. 11. 23.


강진 백련사


동백 숲 반짝이는 천년고찰


글·사진 남상학



만덕산 아래 자리잡은 백련사 대웅전


 아침 일찍 백련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번지 일대, 울창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련사(白蓮寺)가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름과는 달리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다.


 사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 3,000여 평에 이르는 언덕에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이 펼쳐져 숲속은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그윽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숲에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네 기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아직 개화가 되지 않은 동백나무의 윤기 흐른 잎새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동백꽃이 만개하면 또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며 백련사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국가 지장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 숲에는 근데군데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섞여 있고, 뒤로는 차밭이 있다. 동백나무의 높이는 평균 7m쯤 되고,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숲을 이룬다.


 본래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남쪽 난온대지방에서 자라는 대표수종이며, 고창 선운사의 동백나무 숲과 더불어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거제도의 지심도, 장사도, 여수의 오동도, 금오도도 동백이 숲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며, 꽃은 2∼3월에 적색으로 피는데 이 기간에 백련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백련사 동백 숲의 유래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이 가까이 있고, 그가 백련사를 왕래할 때 동백나무 숲을 즐겨 감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萬德山白蓮社’(만덕산백련사)라고 쓴 일주문을 지나 아름드리 동백 숲을 끼고 오르는데 고재종 시인의 ‘백련사 동백 숲길에서’라는 시가 발목을 잡는다.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시가 길어서 일부만을 소개한 것이지만, 고재종 시인은 자연에 대한 사색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조화시킴으로써 정신의 깊이와 함께 대자연의 근원에 감춰져 있는 서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힘이 있다. 이 숲은 해탈문을 지나 거의 만경루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만덕산 백련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통과하면 계속 동백숲이다. 




 


백련사, 백련 결사의 중심지 

 

 계단을 걸어 만경루를 올라서니 바로 대웅보전이다. 여러 단으로 쌓은 돌 축대 위에 육중한 만경루가 대웅보전을 가로막으며 올라앉아 있다. 답답한 듯하지만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는 가람배치이다.


 백련사는 높이 409m의 부드러운 육산 만덕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839년) 때 무염(無染)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무염선사라면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창한 그 스님이다. 그 후 절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 백련사가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고려 희종 7) 천태종계의 승려 요세(了世, 1163~1245)가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함으로써 대단한 거찰이 되었다. 그 후 백련사는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자리잡았던 조계종의 정혜결사로, 보조국사 지눌이 열었다)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 수행결사의 양 갈래를 이룬다.


 백련사는 백련사만이 갖고 있는 자부심이 있다. 그 첫째는 백련결사 운동을 주창한 것이며, 둘째는 고려 8국사와 조선 8대사를 배출한 명찰이라는 점이다. 요세는 절이 완공되자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침체한 불교 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요세는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를 맺고 1236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켰다.


 백련결사는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행결사(信行結社)였다. 이때 득도한 제자가 38인, 백련사의 백련결사에 참여한 사찰이 5개 소, 결사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불교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교단을 비판하고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백련결사의 사상적 경향은 서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백련사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여덟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도 거듭 번창하여 소요, 해운, 취여, 화악, 설봉, 송파, 정암, 연파 등 8명의 조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백련사는 고려 말,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폐허화되었다가 조선 세종 때 효령대군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해탈문 주변에도 온통 동백숲이다.

멀리 만경루가 보인다.

만경루 앞뜰에서 자란 250년 된 배롱나무

만경루의 지하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웅보전


 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대웅보전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지붕 네 귀에는 네 개의 활주(活柱, 추녀 뿌리를 받는 가는 기둥)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의 건물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외에도 시왕전·나한전·만경루·칠성각·요사채, 범종 등이 있다.  특히 만경루(萬景樓)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전망이 뛰어나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있다. 천년 고찰을 돋보이게 하고 있는 만경루에 올라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로 전라도가 낳은 대 철학자요 문인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 1572)의 시를 음미해 본다.


 “오월에 만경루 오르니/ 서늘한 바람 불어와 가을 기운 움직이네./ 누런 구름 이랑에 기름지니 풍년 만났고/ 강설은 가지에 뭉쳐 객은 시름을 잊네./ 흥을 타 한 잔 마시며 애오라지 즐거워하고/ 삼 년을 서로 생각하니 다시 유유하구나./ 남쪽 변방 장기 속에 청담을 펴니/ 뉘라서 깊은 걱정으로 머리 희게 할까”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적었다. 이곳에서 내다보는 주위의 경관이 그만큼 아름답다.









백련사 사적비


 대웅전 서쪽 축담 아래로 백련사 사적비가 있다. 보물 제1396호로 지정된 강진 백련사 사적비다. 높이 447cm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귀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시대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비문에는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정, 그리고 백련결사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밖의 유적으로는 원묘국사중진탑, 강진 백련사 원구형 부도가 있다.



백련사 사적비와현판


원묘국사 중진탑


백련사 차밭


 그리고 주변에는 차밭이 있고, 차밭 옆으로 다산이 유배생활 11년간 머물렀던 다산초당 가는 길이 있다. 그 갈 욮으로 3,000여 평에 달하는 차밭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가 있던 산은 고려시대 때부터 자생해온 야생차 밭이 있어서 '다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정약용은 이곳에 유배와 지냈다는 의미로 '다산'이라는 호를 지었다. 또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백련사 주지였던 아암 혜장스님과 이 길을 오가며 서로 유학과 불교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던 길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의 교류


 다산 정약용과 아암(兒菴) 혜장선사(惠藏, 1772∼1811)와의 인연은 혜장선사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련사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다산과 혜장과의 만남은 다산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 대한 시각의 변화와 다도(茶道)를 통한 심신의 안정이 그의 학자적 정신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간 다산은 5년 뒤에 백련사로 찾아가 혜장 스님을 만났다. “우연히 집 뒤의 나무꾼 길을 따라/ 드디어 들머리 보리밭을 지나왔네./ 외진 마을 벗이 없어/ 스님 좋은 걸 알았다네./ 때로 먼 산 바라보던 도연명 생각이 나서/ 한두 편 산경을 놓고 스님과 함께/ 얘기했네.” -‘봄날 백련사에 가 놀다[春日游白蓮寺]’〈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5권. 화사한 봄 날, 숲길을 따라 절에 도착한 선비가 스님을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고요하고 맑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지는 시다.


 또, 정약용 선생은 혜장선사와의 인연에 대해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라고 읊었다.


 교류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친해졌고, 아암 혜장은 다산 정약용에게 차맛을 처음으로 깊이 알게 해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혜장선사는 강진의 차 역사를 떠나 전국의 차 역사의 중흥기를 만든 다산 선생과 초희선사의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차 맛을 안 다산은 마치 임금에게 상소하는 듯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걸명소(乞茗蔬)’라는 다시(茶詩)를 혜장선사에게 보낸 것을 보더라도 두 사람의 친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


 다산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며 혜장선사가 40세에 입적할 때까지 6년 동안 차에 얽힌 혜장선사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혜장선사의 ‘아암(兒庵)’이라는 호는 다산이 혜장의 급한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부드럽기가 어린 아이 같이 하라'는 의미로 지어주었다.


 혜장이 입적했을 때 다산은 “하늘은 그를 일찍도 데려갔네./ 이제 복희씨의 일 함께 논할 이 없어/ 붉은 난간에 홀로 서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라고 하며 슬퍼했다. 다산은 혜장의 비명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빛나는 우담발화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펄펄 나는 금시조가 잠깐 앉았다가 곧 날아갔네.”


 이렇듯 두 사람은 1km 남짓 거리의 산길을 오가며 유학을 논하고, 불교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며 차담을 나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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