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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해남·진도 여행, 먹으로 찍은 듯한 섬과 구름 휘감긴 절집

by 혜강(惠江) 2017. 12. 22.


해남·진도 여행


먹으로 찍은 듯한 섬, 구름 휘감긴 절집


- 어느 새 한 폭 풍경화 속에 들어왔구나 -



문화일보 박경일 기자



이른 아침 전남 진도의 첨찰산(485m) 정상에서 바라본 해남 일대의 모습. 먹을 찍어 농담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바다 너머로 두륜산과 달마산이 그려내는 선이 뚜렷하다. 이날 첨찰산에서는 제주 한라산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가을이 여행하기 좋은 계절인 건 청명한 날씨 덕도 있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감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 더 회화적입니다. 가을 여행의 주제로 ‘미술’을 앞세웁니다. 남도의 땅끝 해남과 그 너머의 진도를 목적지로 삼은 건 그곳이 다양한 예술적 전통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 다양한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년에 이곳에서 개막하는 전남 국제 수묵비엔날레에 앞서 열리는 ‘프레수묵비엔날레’ 전시가 진행 중이며 행촌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수묵남도’ 전시도 곳곳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남도 명문가의 종택 전시장에서,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1000년 고찰의 누각에서, 예술가들이 다듬어낸 어촌의 골목길에서, 그리고 일망무제의 경관이 펼쳐지는 진도의 첨찰산 정상에서 만난 예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그림 한 장이 여행을 유혹하다



    


 여기 남도로의 여행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강렬한 인상의 그림이 한 점 있다. 윤두서의 ‘자화상’.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와 굳게 다문 입술,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 수염…. 그림에서는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몸이 지워진 채 얼굴 부분만 남아 있는 것도 그렇고, 그림 속 인물의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듯해서도 그렇다.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그림은 국보 240호다. 그림은 서울의 대형 박물관이 아니라 전남 해남의 해남 윤씨 문중 종택에 조성된 고산 윤선도 유적지의 유물전시관에 있다. 윤선도가 누구인가. 늘 치열한 당쟁의 중심에 서 있어 일생을 유배지와 벽지에서 보낸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어부사시사 등의 문장으로 조선 시대 시가 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졌으며 병자호란의 와중에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남다른 눈썰미와 빼어난 솜씨로 부용동 정원을 지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윤두서의 그림은 왜 윤선도 유적지에 있을까. 그건 윤두서가 윤선도의 증손자이기 때문이다. 둘 다 해남 윤씨, 같은 문중이란 얘기다.

 유물전시관에는 지금 윤두서의 자화상 진본이 걸려 있다. 전시관에서 자화상 진본을 전시하는 건 드문 일이다. 그동안 진본은 수장고에 들여놓고 모사본만 전시해 왔는데 외부 전시를 위해 대여됐다가 반납받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진본을 걸어두게 됐다는 게 전시관 측의 설명이다. 언제 수장고에 들여놓을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니, 지금이야말로 관람객이 거의 없는 전시관을 통째로 전세 내다시피 독차지한 채 진본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 셈이다.


# 좌절한 선비, 혁명의 그림을 그리다


▲ 우리 미술사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윤두서의 ‘자화상’.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 유물전시관에서 진본을 볼 수 있다.




 ‘자화상’ 그림 앞에 오래 서서 윤두서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 본다. 입체감 있게 표현된 얼굴부터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성한 수염, 살아있는 듯 꿰뚫어보는 눈동자까지…. 어찌나 묘사가 생생한지 가슴이 다 두근거릴 정도다. 그림 속의 인물이 300여 년 전 사람이고, 필법 또한 그때 것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림 속의 인물에서 느껴지는 건 기품과 고독이다. 당쟁에서 패한 가문의 후예로 일찌감치 벼슬의 뜻을 접어야 했고, 사랑하는 이들의 잇단 죽음과 옥사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윤두서의 일생이 그랬다.

 자화상이 워낙 강렬해서일까, 윤두서의 다른 그림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물전시관에는 자화상 말고도 다른 그림이 여럿 있다. 나무에 매어 놓은 살찐 말을 그린 ‘백마도’, 격렬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용을 그린 ‘수룡도’를 비롯해 20점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먹구름을 몰고 오는 용의 모습을 부채에 생동감 있게 그린 ‘희룡행우도’에서는 자화상에서 보여준 뜨겁고 짙은 필체가 느껴졌다.

 윤두서의 그림 중 자화상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주의의 풍속화들이다. 중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그는 서민들의 삶을 즐겨 그렸다. 서민의 노동을 천시했던 신분제 사회이자, 산수화의 관념적 화풍이 득세했던 시대에 서민들의 있는 그대로의 생활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건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시관에는 나물을 캐는 아낙네, 밭을 가는 농부, 짚신을 삼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윤두서가 남기고 간 이런 그림들은 반세기쯤 뒤 김홍도, 신윤복으로 이어지는 풍속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미게 됐을 것이다. 윤두서의 예술적 감성은 아들 윤덕희를 거쳐 손자 윤용으로 이어졌다. 훗날 남종화의 계승자인 소치 허유도 해남 윤씨 종택에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 사람의 뜨거운 자취가 뒤에 오는 이의 작품에 온기로 담기면서 남도의 예술적 전통과 맥은 그렇게 이어왔다.


# 한 가문의 성취가 보여주는 것들

  그림 한 점을 따라 당도한 곳이 해남 윤씨 문중 종택 ‘녹우당’이다. 녹우(綠雨)란 ‘녹색의 비’다. 이를 두고 ‘늦봄과 초여름 사이 잎이 우거진 때 내리는 비’라고도 하고, 종택 뒤편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 때 ‘쏴아’ 하는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 됐건 덕음산 아래 비자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녹우당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요즘도 지관들이 공부를 위해 찾아들 정도다.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위세는 아직도 해남에서 당당하다. 자그마치 500년이 넘도록 말이다. 본디 해남 윤씨는 강진에서 건너왔다. 해남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이는 윤효정이다. 해남 대부호의 사위가 된 그는 아예 해남으로 건너와 덕음산 아래 집 자리를 잡았다. 그의 호가 어초은이라 그의 후손을 어초은파라고 부른다.

 해남 윤씨 가문은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문학·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선비라고 글만 읽었던 게 아니라 글을 쓰고, 빼어난 그림을 그리고, 훌륭한 정원을 만들었다. 정치적 감각과 경제적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문화적 자질까지 두루 갖춘 이들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남도 땅의 풍류와 문화의 전통에 해남 윤씨 가문이 보탠 것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해남 윤씨 가문이 이런 문화적 성취의 바탕은 ‘돈’이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대대로 바다를 막아 농토를 일구는 개간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남 윤씨의 간척사업은 민간에서 이뤄진 것으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어초은이 처음 관으로부터 간척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고위 관료였던 사돈의 정치적 도움이 적잖았으니 돈을 버는 과정에서 필요한 ‘현실감각’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훗날 문화적 성취를 이룬 후손들도 쌓아 놓은 돈을 그저 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윤선도 역시 환갑 무렵 진도의 갯벌을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바다를 막아 만든 땅이 자그마치 198만㎡, 그러니까 60만 평이나 됐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쯤 되는 땅이다. 그가 이 땅에서 번 것만으로도 평생 쓰고도 남을 정도가 아니었을까.


미황사 누각인 자하루에 들여놓은 미술관에 걸린 조병연 작가의 ‘천불’. 다양한 모양의 1000개 돌에다 부처를 그렸다.
    



# 뒹구는 돌 1000개가 부처가 되다

  해남의 절집이라면 누구든 대흥사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대흥사 절집의 당당한 위세도 그렇거니와, 묵은 맛이나 전해지는 이야기도 여기를 넘볼 만한 절집이 해남은 물론, 남도 전체에서도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화적인 시선으로 절집을 본다면 달마산의 미황사가 대흥사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대흥사가 서사적인 느낌의 절집이라면, 미황사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절집이다. 갈기처럼 솟은 달마산의 힘찬 암봉 아래 단청이 지워진 채 말갛게 들어선 법당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야말로 그 앞에 선 이들에게 미감을 일깨워 준다.

 이승미 행촌문화재단 관장의 얘기. “미황사 앞에 처음 선 화가들은 예외 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요. 그걸 보면 미황사에 미감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전후 사정과 인연이 있을 것이다. 법당으로 드는 누각 ‘자하루’가 우아한 미술관이 된 까닭에는 말이다. 여름방학이면 아이들을 위한 한문학당으로 쓰이던 자하루를 미술관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는 행촌문화재단에서 처음 나왔다. 사찰 측은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 환경을 갖춘 사찰이 새로운 창작을 위한 자양분이 됐으면 한다’며 흔쾌히 공간을 내놨다.

 자하루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조병연 작가의 작품 ‘천불’이다. 1000개의 돌에다 부처를 그려 벽에 붙였다. 공깃돌보다 조금 더 큰 것부터 작은 수박만 한 것까지 제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돌에다 앉고, 서고, 누워 있는 부처의 모습을 그렸다. 길가에 뒹굴던 하찮은 돌이 부처로 현신했으니 선명한 상징이다.

 미술관 안에는 유독 미황사를 담아낸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밝은 눈과 예민한 감성의 화가에게도 달마산과 미황사가 빚어내는 미감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림을 보고 자하루 문을 열고 나서면 그림 속에서 본 미황사 풍경이 바로 눈앞에 있다. 가을날 이른 아침이라면 필시 구름이 달마산의 암봉을 휘어 감고 있으리라. 그 장면을 그림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화가나 우리나 매한가지다.  



행촌문화재단의 풍류남도 아트 프로젝트 ‘수묵남도’전이 열리고 있는 미황사 자하루미술관에 걸린 이서 작가의 ‘달마산 미황사’. 삼베 위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 생활과 예술의 담을 허무는 꿈

  이쯤에서 행촌문화재단을 설명하고 가자. 행촌문화재단은 해남종합병원 설립자인 고 행촌 김재현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역에 세운 재단이다. 난과 도자기, 다도, 서예 등을 즐겼던 그는 생전에 해남을 비롯한 진도, 완도, 강진, 영암 지역의 예술가들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남도의 정서가 깃든 이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그림을 사주는 것만으로도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든든한 후원이었다.

 그가 작고한 뒤 병원을 이어받은 아들 김동국 원장은 부친의 유지를 이어 해남의 지역 예술을 후원하기 위해 행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병원 한쪽에 미술관을 들였고, 연륙교가 놓인 섬 임하도의 병원 수련원을 창작공간 겸 숙소로 내줬다. 해남읍에도 미술관 하나를 더 짓고 있다. 병원의 미술관도, 새로 지을 미술관도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지게 된다. 문화 소외의 굴레를 벗고 지역에서 생활과 예술의 담을 허물어버리는 것, 그게 행촌문화재단이 꾸고 있는 꿈이다. 그 꿈대로 미황사 자하루가 미술관이 된 것처럼 해남 녹우당의 빈 공간과 대흥사의 일지암, 강진 백련사에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행촌문화재단은 3년째 ‘풍류남도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해마다 다른 주제를 들고 지역의 다양한 공간에서 미술 전시를 하는 행사다. 올해 프로젝트가 내건 주제는 ‘수묵남도’로 이달 말까지 해남의 행촌미술관, 미황사 자하루미술관, 수윤미술관, 해남공룡미술관, 해창주조장, 강진 백련사 등에서 열린다. 마침 목포와 진도 일원에서도 11월 12일까지 프레수묵비엔날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이번 주말 목포, 해남, 진도를 잇는 여정을 계획한다면 청명한 가을날 예술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질 수 있겠다.


#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마을

  예술로 테마를 잡고 떠난 여행이라면 해남의 우수영 문화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우수영 문화마을은 지난 3년 동안 진행해온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 전체가 독특한 문화 예술 공간이 된 곳이다.

 우수영 마을이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지인 울돌목 지척에 있는 문내면 동외리, 서상리 등 10개 마을을 이르는 명칭. 농토가 척박하고 갯벌이 없어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이 마을에 마을 재생프로그램으로 지난 2015년 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돼 골목과 담벼락 등 마을 곳곳에 67개의 공공미술작품을 들여놨다. 우수영 주민들의 삶을 담아낸 벽화와 조각은 물론이고, 아트하우스, 만화갤러리, 카페 등이 골목 곳곳에 빈 점포 자리에 들어서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됐다.

 주민이 떠난 흙집의 내력을 뒤져서 일제강점기 면사무소가 운영하던 ‘면립상회’로 복원했는가 하면, 낡은 여관 건물은 전시장을 갖춘 생활사박물관으로 다듬어냈다. 길가의 빈집에는 지역 주민들의 사진과 영상을 상영하는 소울아카이브관을 들여놨다. 맥락 없는 서툰 벽화를 골목마다 도배하다시피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요즘 벽화마을과는 격이 다르다. 작가의 이름을 내건 작품마다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고 아이디어도 참신하다. 공공미술작품으로 꾸며진 공간은 두 개의 제법 긴 골목이 중심이 되는데, 곳곳에 쏠쏠한 볼거리가 많아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번호가 매겨진 공공미술품을 찾아 사진도 찍고, 다양한 공간에서 체험도 한다면 반나절쯤은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자하루로 오르는 계단을 딛고서 바라본 미황사 전경. 법당의 단청이 지워져 말갛게 세수한 듯 보인다.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면서 절집 뒤의 달마산 암봉에 운무가 피어올랐다



# 진도, 운림산방에서 첨찰산까지

  우수영에서 울돌목을 건너는 진도대교를 넘으면 진도 땅이다. 남도의 회화사를 말할 때 진도를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운림산방 때문이다. 진도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유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소치는 대흥사에 있던 초의 선사의 배려로 녹우당의 윤두서 작품을 보는 것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추사 김정희를 만나 글과 그림을 배웠고 평생을 떠돌다가 나이 50세에 진도로 내려와 죽는 날까지 살았다. 이로써 진도는 미산 허형, 남농 허건과 임전 허문, 방계손인 의재 허백련 등 남종화의 거대 화맥의 뿌리가 됐다.

 소치가 직접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꿨다는 운림산방은 소치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 방치됐다가 손자 남농 허건이 사비를 들여 복원한 뒤 진도군에 기부채납한 것이다. 화가의 안목으로 지은 덕분일까. 운림산방은 어느 계절에 가도 운치가 넘친다. 첨찰산의 초록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지만, 여름 한철 무성하게 붉은 꽃을 틔웠던 운림산방 앞 연못의 배롱나무는 잎을 다 떨궜다. 대신 쌍계사로 이어지는 동백 숲 그늘에 때를 잊은 붉은 동백꽃 두 송이가 일러도 너무 이르게 피어났다.

 운림산방에는 소치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소치 가문이 이어온 남종화의 계보와 작품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으로, 소치의 화맥을 잇는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인 허림, 임전 허문으로 이어지는 한 집안의 그림 전통을 넘어 근대 호남 회화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 흐름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운림산방 인근의 남도전통미술관이다. 이곳에서는 지금 프레수묵비엔날레 특별전시 ‘남도의 화맥’ 전이 열리고 있다. 소치 허유에서 시작한 화풍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전시다. 근현대 남도 화단에서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이 양대 산맥을 이뤘듯이 전시도 의재와 남농의 제자들을 계열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진도에 갔다면 운림산방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첨찰산을 올라보자. 첨찰산은 해발 485m로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정상 부근의 기상대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놓여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로 올라간 뒤 차를 세워두고 딱 100m쯤 걸으면 봉화대가 있는 산정에 설 수 있다. 이른 아침 여기에 올라서 보는 해남 일대의 경관은 그것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며 겹겹이 겹쳐지는 능선의 모습이 솜씨 좋은 화가가 먹을 찍어서 농담으로 그려낸 것 같다. 첨찰산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남도 땅은 경관이 그림이고, 그림이 경관이다. 그래서 남도에서는 그림을 찾아가는 길이 곧 풍경을 찾아가는 길이고, 풍경을 찾는 길이 그림을 찾아가는 길이 된다. 지금, 가을로 가득한 남도로 떠나는 여행이 그렇다.


■ 해남 ‘미식기행’



    


 해남·진도 무엇을 맛볼까 = 해남에서는 천일식당의 떡갈비(1인분 2만8000원)가 가장 이름났지만, 한정식으로 해남 사람들이 더 높이 쳐주는 맛집이 한성정(061-536-1060)이다. 떡갈비, 홍어삼합, 새우찜 등을 푸짐하게 상에 올리는데 4인 한 상 기준으로 내온다. 15만 원. 한정식이 부담스럽다면 1인분에 1만 원짜리 뚝배기 주물럭을 내는 소망식당(061-533-3456)도 추천할 만하다.

 해남에는 맛있는 막걸리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청주를 만들었던 술도가 해창주조장에서 빚는 해창막걸리다. 해창주조장은 오병인·박미숙(55) 동갑내기 부부가 지난 2007년 귀농해 운영하고 있다. 해창막걸리는 6·9·12도짜리 세 종류가 있다. 도수가 높을수록 진득해서 12도짜리는 아예 요구르트와 같은 질감이다. 해남의 질 좋은 쌀과 찹쌀을 섞고, 인공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술을 빚어 맛이 은은하고 부드럽다.

 해남의 식당 등에서 맛볼 수 있지만, 해창막걸리를 꼭 주조장에 가서 마셔야 하는 이유는, 잘 가꿔진 주조장의 정원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했다는 정원의 운치가 훌륭하다. 수령 700년 된 배롱나무가 가지를 뒤틀고 선 정원 한쪽에는 공덕비가 하나 서 있다. 왕의 밀명을 받은 암행어사의 신분을 숨긴 채 해운 해창의 관리·감독을 위해 5년 동안 해남 땅에 머물렀던 백파 신헌구가 한양으로 가면서 정원이며 전답을 마을 주민들에게 주고 떠나자 그를 기려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2017. 10. 25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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