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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영국

'셰익스피어의 고향' 영국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by 혜강(惠江) 2017. 2. 9.

 

'셰익스피어의 고향' 영국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소년 가장·시골 청년' 셰익스피어의 흔적이 곳곳에…

 


신정선 기자 

 

 


 

* 1564년 4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영국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주택. 문호의 자취를 찾아 한 해 490만 명이 인구 2만7000명의 소도시를 찾아온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영국 소도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50대 남성이 임종하며 유언을 남겼다. "아내에게는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남겨주노라." 현재 런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유서는 후세 사가(史家)들의 머리를 싸매게 했다. 평생 고락을 함께한 아내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 침대, 그것도 '두 번째로 좋은' 침대라니? 부부 사이가 안 좋았나? 모욕을 주려고 했나?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문호(文豪) 셰익스피어가!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생애 전체가 풀 길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다. 세례 기록, 과세 증명서, 법정 문건 등 100여 건에서 밝혀진 사실(史實) 몇 가지에 합리적인 추론을 더해 살을 붙인 인물이 우리가 아는, 혹은 안다고 오해하는 셰익스피어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익숙한 얼굴도 그가 확실하다기보다는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에서 나왔다.

 

 분명한 것은 그가 태어난 곳이 스트랫퍼드였고, 그곳에서 결혼했고, 그곳에 묻혔다는 사실이다. 스트랫퍼드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63㎞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 2시간, 기차로 2시간 반 걸린다. 인구 2만7000명 소도시에 한 해 관광객 490만 명이 몰려든다. 이유는 하나. 셰익스피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를 숭배한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18세기 후반에 순례객으로 다녀갔다. 천재 작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경외심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그의 생가(生家)에서 꼬마 윌리엄을, 유일하게 다녔던 학교에서 소년가장을, 영면한 교회에서 야심 찬 시골 청년과 노회한 지방 유지의 얼굴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중심가로 나서면 수 미터 높이에 세워진 셰익스피어 동상이 객(客)을 맞이한다. 도시를 휘감으며 흐르는 에이번강(江)을 내려다보는 그를, '사느냐 죽느냐' 여전히 고민 중인 햄릿, 레이디 맥베스, '헨리 4세'에 나오는 할(Hal) 왕자와 뚱보 기사 팔스타프 등 4명의 조각상이 둘러싸고 있다. 거리는 중세 시대 바둑판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상을 끼고 돌아 20분 정도 걸어가면 19세기 초반 국민적인 보존 캠페인이 벌어졌던 생가가 나온다. 16세기 2층 목조주택으로,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가 사들였다. 존은 시의원을 지내다 1568년 시(市)의 최고위 선출직인 수석 행정관에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시장에 해당한다. 어머니 메리 아든은 대지주의 딸이었다.

수백년 전 비밀을 엿보는 듯 집에 들어서면 여동생이 살던 1층 작은 방이 열린다. 기자의 앞으로 10여 명의 일본 관광객, 뒤로는 대여섯 명의 중국 관광객이 줄줄이 따라나섰다. 엉덩이를 부풀린 긴 치마에 어깨 주름이 풍성하게 잡힌 옷차림의 여성들이 곳곳에 서 있다. 생가를 관리하는 셰익스피어생가재단(Shakespeare Birthplace Trust)에서 나온 직원이다. 응접실에는 캐노피가 크게 드리워진 침대가 눈에 띈다. 당시 침대는 상당한 사치품으로,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를 은근히 과시하는 용도였다. 16세기 양식대로 고증한 홀(hall)에는 금방이라도 오찬을 시작할 듯 그럴싸한 식탁과 모형 음식을 차려놨다. 벽난로에는 요리 기구와 고기 굽는 쇠꼬챙이도 있다. 당시에는 11시가 점심때였다. 일곱 살 꼬마 윌리엄이 다니던 학교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아침 6시부터 수업받던 윌리엄은 점심을 먹으러 귀가했다. 복도 끝 편에는 아버지 존의 가죽공방이 재현돼 있다. 존은 그 시대 패셔니스타의 필수품이던 장갑을 손수 만들었다. 양, 사슴, 염소의 가죽을 직접 벗기고 무두질해 런던 등지에 내다팔았다.

상당히 유복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린 윌리엄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3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연 공직을 그만둔 데다, 사업도 실패했다. 장남 윌리엄은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7년간 문법학교에서 배운 문법과 문학이 정규 교육의 전부다. 셰익스피어가 가공인물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그의 짧은 가방끈 탓이 크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지방 청년이 법률, 의학, 정치, 궁정 생활, 군사, 골동품, 외국 생활 등 해박한 지식을 두루 통달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이가 지금도 많다.

생가를 나와 30분쯤 걸어가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의 생을 증언하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가 나온다. 세례 날짜는 1564년 4월 26일이다. 정확한 탄생일은 모른다. 태어나고 사흘 후 세례받는 것이 관습이었으므로 23일로 추정한다. 셰익스피어는 교회에 묻히려고 미리 교회 토지를 사두는 등 정성을 들였다. 52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사인(死因)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창궐하던 티푸스라는 설이 유력하다.

교회 입구 작은 문을 통과하면 파란 화살표가 '셰익스피어의 무덤은 이쪽'이라고 알려준다. 안쪽 깊숙이 누운 그의 묘비 위로 시구가 선명하다. '좋은 친구, 제발/여기 덮인 흙을 파지 말게나/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기를'.

 



[출처] 2016. 9. 22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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