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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창작21 신인상 :말을 굶다 외 4편 / 신춘희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창작21 신인상>

말을 굶다 외 4편

 

 

신춘희

 

말이 고픈 노인

한적한 공원 의자에 앉아

지팡이로 땅바닥이나 뒤적인다

 

후드득 힘없이 떨어지는 갈잎

한 생애가 버짐 꽃처럼 피었다

 

텅 빈 가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단칸방을 향해가는 노인

귀동냥하듯 전동차의 소음에 목을 축이고

쫄깃한 말을 주머니에 넣는다

 

내릴 역을 지나 종점에서

헐값으로 주워온 말들

 

연탄불에 올려 라면 끓이듯 맛을 본다

미셀

할롱 베이가 한눈에 펼쳐진 크루즈 안, 물 위에 산이 있고 섬이 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발코니에서 잠든 너를 본다 침대 속으로 얼굴을 묻은 미셀

뾰족구두에 휘어진 발가락, 나의 눈에는 아직도 네가 보인다

첫 만남을 회상한다

설렘, 빛깔, 양수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울림

샛별이 움트는 작은 소리 보석처럼 빛났다

난 왜 몰랐을까

가지 끝 뭇 별들이 매달린 나무도 힘에 겨워 기울어진다는 걸

수면 위에 쏟아내는 말의 화음을 맞추지 못한 고백에도 뼈가 있고

상처가 있다는 걸

빛으로 채워진 눈동자, 움켜진 손에서 튕겨나간 에메랄드, 너는

오랫동안 홀로 빛을 삼켜야만 했지

미셀, 너는 알까

저녁을 맞이한다는 건 경험한 일이 아니기에

실수를 하고 마음을 다치기도 했어

힘에 겨워 달력을 넘기지 못한 날은 변명을 늘어놓기도 해

눈물이 없었다면 어디에서 삶의 진액을 뽑아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비우는 삶이 어디까지인지

미셀,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수면 위에 떠있는 섬들처럼 먼발치에서 별을 헤아리며 바람을 막아주고 싶어

오늘밤 창문을 열어 두겠니

찌개

 

가격이 착한 고깃집에서 먹는 찌개를 좋아합니다

숯불 위에 올린 양은 냄비

얼큰한 국물에 듬성듬성 김치를 넣고 끓여 먹는 목살

시래기에 매콤한 양념을 넣고 졸이는 고등어찌개

냉이 달래가 품은 햇봄을 가득 넣은 된장찌개

식당을 두리번거리는 눈에는 네모난 메뉴판만 보입니다

국물이 있는 요리를 골라 먹는 건 나만의 식견입니다

혀 밑에 똬리를 튼 미각의 샘

손끝으로 차린 밥상 위에는

종잇장에 적어놓은 기밀문서가 조금씩 벗겨지기도 합니다

부대끼며 먹는 말은 진공 포장이 되어 있고

명치끝에 쌓인 응어리는 급랭을 시킵니다

삼킬 수 없어 역류되기도 한 재료들을 모아

천천히 녹입니다

유통 기간이 없는 삶의 찌개에 대파를 송송 뿌려 줍니다

적당한 불에 은근히 졸여야 인생도 제 맛이 납니다

 

  태생지는 불이다 날을 세운 칼끝은 쇠 비린내가 난다 용광로를 들락거리며 자신을 단련시킨 시퍼런 칼은 선과 악으로 만들어진 불의 결정체다

  녹슨 철을 품은 불은 철과 상극이다 풀무에 달구어진 칼은 바람의 목도 쉽게 베어 버리는 습성이 있다 칼끝마다 맹독을 품고 있어 잘 다스려야한다

  담금질한 칼도 제 안에 고인 물은 쉽게 베지 못한다

  몸속에서 칼 소리가 난다 토막토막 먹을 것을 썰듯 도마 위에 쏟아내는 말, 비린내로 채워진 손끝은 칼자루가 알고 있다 속삭이는 말은 된장찌개 같고 무딘 소리는 소여물과 같다 칼등을 쥔 손의 뼈가 자주 쑤신다

  움푹 파인 숫돌에는 칼을 베어 문 희생이 있다 파일수록 깊이 파고든 흔적 물이 스며든 만큼 쏟아내는 진물, 무딘 흉터도 하루하루의 숫돌 속으로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더는 날이 상하지 않도록 앞치마에 당신을 받아둔다

 

슬픔은 내일 다시 태어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슬픔을 삼킨 적 많았다

마음속에 터를 잡은 자투리 같은 사연

먼지처럼 수북이 쌓였다

추스르지 못한 몸

가슴에 뿌리 내린

화살나무 몇 그루

충혈 된 눈 속에 울음을 물고 달라붙은 잎새

문질러도 떨어지지 않아

입 밖으로 신음 소리를 낸다

잦은 울렁증과 쉽게 뱉어 버린 말들도

접착제같이 달라붙은 낯선 이름을

슬픔의 기억 속에서 떼어내지 못한다

그 많은 눈물도 보이는 만큼 담을 수 있는

여린 마음

수평선까지 퍼 나르는 바람의 노을을 본다

물길 속으로 멀어지는 한줄기 빛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당신의 슬픔

내일 다시 태어난다

당선 소감

 

  종이의 깊이만큼 낮은 자세로 천천히 걸어가겠다.

  장봉도, 섬 트레킹을 하다 당선 소식을 접했다. 순간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내 안에 터를 잡았던 물기 마른 나무 한 그루 분갈이할 때가 된 것 같다. 손가락을 펴서 여백을 묻는 구간마다 행을 나누고 화분에 새 흙을 섞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저 나무가 자리를 잡기까지 뿌리는 한동안 성장통을 앓겠지. 창틀 사이로 햇살이 다녀가고 바람도 놀다 가는, 따뜻하게 속내를 채워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나의 철없는 문학의 시작은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시 한 편 걸어놓고 싶은 것이었다. 밤의 공기 속을 떠도는 가랑잎처럼 시가 매워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고 싶을 때 손을 잡아준 선생님과 따뜻한 눈동자를 보내준 문우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시인의 방을 만들어준 후견인 남편과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내며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창작21 심사위원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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