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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한국문학방송 신인문학상 수상작 : 밤, 몽상가의 일기 외 / 권오성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한국문학방송 신인문학상 수상작>



밤, 몽상가의 일기


권오성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죽은 바다를 생각하다가
꽃의 휘파람 소리를, 붉은 물고기가 밤을 따라가는 소리를
눈으로 듣는다                                      
기적이 울리고 밤이 오고 
기차는 빠르게 꽃의 마을을 빠져나간다                         
그런 날이면 눈발은 산책자처럼 밤을 스쳐가고 
목동은 먼 곳에서 잠든다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귀를 열어야 할까 
꽃의 플랫폼에서 얼어가던 구름, 술잔 속으로 날아왔던 미지의 새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똑 똑, 누가 내 귀를 두드리는 소리
붉은 물고기를 데리고 눈이 아름다운 방랑자가 찾아왔을까
방랑자가 바이올린을 켜 꽃의 목을 비틀거나
마을을 지키는 붉은꼬리쥐뱀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소리일까
마치 밤의 내장을 물고 늘어지는 짐승들처럼
내 귀를 물고 늘어지는 꽃의 휘파람소리일까
이런 날 일기를 쓰는 몽상가에게는 
술이 오르고 취한 새벽이 온다

 

아침이 오기 전, 죽은 바다를 위한 파반느를 쓴다는 건 
기적을 울리는 일이지만, 
흰 상자를 짜는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방랑자의 노래는 얼마나 오래 써졌던가
눈발은 산책자처럼 스쳐가도 상자에 담길 노래는 오래 남는다 
미지의 새가 구름을 베고 상자 속에서 잠들어간다
그만 귀를 닫아야 한다

 

  

그때, 새는 보이지 않았지만
 

 

데미안, 우리가 어린 동생과 철모르고 피던 칸나와 작은 가오리연을 두고 
집을 떠나온 것은 실수였을까?
새점을 치던 아침과 빛나는 회초리로 우리의 등을 때리던 햇빛이 
가는 발목 안에서 둥지를 넓히고 있었는데...

 

그때, 발 앞에 놓인 바다에서는 고기잡이배들이 꿈의 예감을 길어 올리고 있었고, 배에 탄 그들은 부리와 날개를 가진 자처럼 새의 냄새가 나는 어부들이었다.
 
어둠 속의 바다를 가만히 만져보니 알을 깨고 나온 새의 피였다

 

소소리바람이 어부들을 흔들 때면 우리도 흔들려, 때로는 
바다란, 가는 정맥을 끌고 도도한 폭풍 속에서 위태롭게 껍데기를 지키는 새로운 알 같은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어린 동생은 얼마나 자랐을까
칸나와 가오리연은 아직도 밤의 겨드랑이 속으로 붉은 폭탄을 던질까?
추락을 모르던 불꽃전사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끝까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해안가의 경이로운 모래알이라지만
고기잡이배들이 그물로 껍질을 부수고 새를 길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찍, 진흙이 찾는 표정을 어떤 분이 예감했듯이 
어린 손이 어린 손을 마주잡고 새점을 치던 아침, 우리가 찾는 표정이 어두운 바다에 있을 것을 예감한 것은 새가 알 속에 있을 때였다

 

 

다시 만날 때까지


공이 굴러 눈사람처럼 커진다 
자꾸 커져서 밤이면 내 잠속으로 찾아온다 푸른 염소 몰고 온다

 

새는 언제나 머리위에서 장미꽃을 꽂고 나를 본다

 

염소가 안 올 때도 있고, 새가 울 때도 있다
오늘처럼 염소를 몰고 왔을 때 내 몸속으로 강물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강물도 불면서 공처럼 굴러간다 
공을 따라 이대로 백 년을 내려가면 바다에 닿겠지, 우리 돌개바람 불어와도 거기서 만나자

 

잠 속이 아무것도 아닌 빈 마을이었을 때, 
염소와 새는 어디서 왔을까? 
처음 눈이 내리듯이

 

백로처럼 왔다가 쪽배처럼 떠난 사람아
잠 속으로 샛바람이 새 울음처럼 섞여들어 당신 이마에서
꽃이 지고 나비가 지고
 
진자리마다 수염이 빠진 구멍처럼 어느 날부터 공이 되어 거리를 굴러다니는 사이 
우리가 키우던 염소는 가는 발목을 끌고 바다에 닿겠지 
우리 반은 죽어서 그렇게 만나지는 것
반은 살아서 이렇게 헤어지는 것

 

 

수수께끼변주곡

 


수수께끼처럼 살다간, 카론성 성주의 옷자락에 눈이 내린다

 

잉카제국의 마추픽추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팬파이프를 불던 목신은 별들의 울음을 들으며 자란다는데

 

카론성 성주가 잠든 고성에는 눈이 내려도 별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목동의 휘파람을 들으며 자라던 양떼들은 깨지 않는다

 

바람이 눈을 털고 정원 옆으로 목장의 문을 열면

 

키 큰 향나무가 잠든 양들을 부르는 소리
돌이 된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

 

마추픽추에서는 아직도 별들이 눈 내리는 쪽으로 귀를 기울일 때
눈 속에서 양들이 오므린 입으로 풀을 뜯다가
목신의 팬파이프가 들리면 잠 밖으로 천천히 발을 내민다는데

 

누가 성주의 옷자락 위에 독한 잠의 꽃씨를 뿌렸을까
독을 품은 꽃들이 바람의 풀피리에 맞춰 
성주의 묘지에 깊이 발을 내리고

 

잠 속까지 촘촘히 눈이 내리고

 

누가 잠 속으로 내려가 목동의 휘파람으로 
수수께끼변주곡 (님로드*)을 연주하는지 고성의 바깥에는 
스스로 우는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곤 한다


*님로드(Nimrod)는 영국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곡으로 밝고 화사하면서도 장엄하다

 

 

광염소나타

 


처음 본 신의 얼굴에서 광기를 보았다
어쩌면 절정이 오기 전부터 핏줄의 길목에서 나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피할 수 없는, 레시터티브의 경건함으로 페달을 밟는 순간, 건반에서 뜨겁게 피가 솟아올랐다
피는 리듬을 타고 현으로 뻗어나가 어느새 불이 붙고 있었다

 

악보를 태우며 불은 먼 시간으로 번져나갔다 
광기의 뼈대를 한 옥타브씩 넘어가는 화마의 성난 스케르초가 불의 천형을 견디며 밤의 지붕위로 뜨거운 순간을 틀어 올리는 동안, 
피는 마지막 한 방울을 겨누어 저만치 서있는 동백꽃을 살라먹고 
 
내 머리 위에서 착한 동백꽃물이 든 별이 죽어가는 때
화기 낭자한 내 얼굴이 번쩍 피아노에 비친다
활활 불타는 건반위에서 미친 듯 춤추는 손가락을 훔쳐보며 광분하던 신의 얼굴이 그만큼 빛나던 것처럼,

 

불의 뿌리로 돌아가던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재가 된 십자가위에 떨어지는 새벽 종소리는 태초에 들었던 불꽃판타지였을까
 
나는 이제야 죽음의 깃을 달고 코다로 질주해 간 아름다운 불새가 되었다

 

 

 

 

권오성

경북 안동 출생(1961)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전문가과정) 수료

계간《미네르바》신인상(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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