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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문예바다 신인문학상 수상작 :둥근 사각형 외 4편 / 류승희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문예바다 신인문학상 수상작>



둥근 사각형 외 4편 


류승희




둥근 사각형



  사각형 위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꼭짓점을 만나게 된다 두 개의 선분이 만나는 끝점에서 우리는 약속을 하고 꼭지를 버렸다 네 개의 꼭짓점에서 네 개의 선분은 그렇게 결별을 하고 발가락을 감추었다 꼭짓점이 사라진 자리가 서서히 아물더니 둥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원의 테두리에 갇혔다


  목덜미가 가려워 한밤중에 깨어나 긁는다 꼭짓점을 버린 자리가 덧나고 있었다 가려움이 잦아들고 손톱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이슬이 맺히면 얼음으로 확확 대는 살갗을 달래 본다 발가락이 자라고 있었다 가려움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어야만 하는 원 위를 걷다 보면 끝없는 고통을 지닌 몸을 만난다 다시 발톱을 기르고 발가락을 내밀어 꼭짓점을 찾으리라 나는 옆으로 가고 싶은 옆으로 긴 사각형이었다고 혹은 위로 팽창하고 싶은 위로 긴 사각형이었다고


  나는 둥근 원이다
  매 순간 탈옥을 꿈꾸지만 잃어버린
  꼭짓점을 찾을 수 없어
  돌고 또 돌다 지쳐 쓰러지는


  나는 네모난 심장을 가진 둥근 원이다
 




달의 뒷면



달이 사라졌다


흔적을 찾아
달이 태어난 바다에 왔다
처음 달이 생겼을 때 지구와의 거리는
서울과 뉴욕을 왕복하는 거리였다지
너무 가깝게 서로를 끌어당겨
다리를 놓아도 될 정도였다는데
어깨가 앞으로 굽도록
수십억 년 동안 지구만 궁금하던 달이,
얼굴을 마주 보고 한 발자국 내딛으면
흰 옷자락을 서둘러 여미며
나만 따라오던 달이,
윤무輪舞의 끈을 자르고
목성의 환한 고리를 붙잡고 떠났다
마주 보는 것들은 뒤를 놓치기 쉽지
푸른 팔을 잘라 주어도 소용이 없네
어느 먼 은하에서 달이 걸음을 내딛는가
바다가 하얗게 울컥인다
밀물과 썰물의 형식으로 흔들리는 바다
달에게 달려갔다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더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달


문득, 사라진 달의 뒷모습이 궁금하다





주담酒談



72도 되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있다
단맛이 독하게 깊다
불을 붙이니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타오른다
타오르는 것들의 얼굴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벽난로 속에서 제 몸을 사르는 장작이거나
석양과 입 맞추는 붉은 샐비어이거나
혹은 못 잊을 그리움이거나
그렇게 타 버리고 난 술을 마셔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술이 아닌 그렇다고
물도 아닌 한때는 술이었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산다는 건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 하나 없이
산다는 건 알콜이 사라진 술처럼
취할 수 없는 슬픈 일
화주를 마셔 본 적이 있다
데일 줄 알면서도
그 뜨거운 불을 삼켜 본 적이 있다





심해어
               


지금부터 나는 발광을 할 거야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
이 깊은 바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눈을 버리고 하얀 뼈마디를 잘라 길을 밝혀야 하지
큰 입에 흉측한 이빨과 튀어나온 눈
살갗이 짓무르도록 문질러 본다
둥그러질 수 있다면
얼음처럼 차가운 수온에
지느러미가 찢기고 체액이 흘러내리죠
그런 것쯤 백만 년 동안 익숙한 일이에요
겨드랑이에 난 하얀 부레를 뽑아
후생에 받을 편지를 썼어요
당신이 그 편지를 들을 수 없다면
세상의 침묵이 다 이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오래된 애인의 눈물은 너무 무거워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아
나는 두 눈을 파 버려요
두 눈을 파서 바다에 던져요
이곳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죠
바다가 환해졌어요
아름다운 붉은 옷을 입고
나 발광하고 있어요
영원히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오후 3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애인과 자주 보던 흰 배롱나무 아래 오래된 애인과 다시 앉는다 한동안 얼굴이 젖어 있더니 날마다 이가 빠져 남은 이가 없다며 오늘은 말이 없다 기쁨은 기쁨으로 살기가 힘들고 슬픔도 마찬가지여서 죽고 싶다던 애인, 꿈을 꾸면 애인은 관흉국貫凶國 사람이 되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웃고 있다 철심으로 종이를 묶듯 심장과 심장에 구멍을 뚫고 서로를 꿰어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렇게 너덜해지고 싶다던 애인, 우리가 피웠던 꽃들을 밟고 찬란한 봄이 얼룩질 때 구멍 난 가슴을 손으로 후벼 파며 뜨겁게 울던 애인은 어디로 갔을까 꽃이 핀 자리 꽃향기는 자취도 없고 손닿는 곳마다 서걱거리는 모래가 돋아나는 오후 세 시, 꽃 피지 않는 배롱나무 뜨거운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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