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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 : 누군가로의 초대 외 / 조영란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



누군가로의 초대 외


조영란

 

   

깊은 우물 속에 띄워둔 누군가의 얼굴

 

빗방울처럼 뛰어가던 소녀의 목덜미에 앉은 나비는 왜 샐비어 꽃을 모른 척 지나쳤을까요,

외로운 살구나무 때문일까요? 단물이 다 빠져버린 살구는 오래전의 살구를 모르고, 나는

우물 속에 띄워둔 얼굴을 모른 채 우물가를 지나쳐왔지요.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

물이 물 밖을 기웃거릴 때 정작 빗방울을 쫓아간 것은 나였을까요? 어디선가 들은 듯한 그

러나 들은 적 없는 빗소리, 그 공명에 내가 빌붙어 살아왔던 걸까요? 빗방울을 모르는 우물

이 기억하는 건 잃어버린 시간일까요, 잃어버린 얼굴일까요?

 

혹시 내 마음 깊은 구석에서 나도 모르는 내가 소리치고 있는 걸까요? 열린 창으로 방문하는

햇빛, 그러나 차마 마음 줄 수 없어 혼자라는 말, 그 멀고 아찔한 높이에서 나는 얼마나 더 망

설여야 할까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속절없이 뛰어내리던 빗방울, 빗방울들……,

 

살구도, 빗방울도 아닌

우물 속에 띄워둔 누군가의 얼굴도 아닌 저 나비를

이제 초대해도 될까요?


 

장대와 비 사이

   

 

장대와 비 사이에 서서 자작나무를 본다

 

흰 뼈만으로 한 생애를 이룬 자작나무 숲속

젖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산자락을 끌고 내려가는 물소리만 가득 귓속에 고인다

바람을 달고 사는 잎사귀들의 아우성,

저 아우성 속으로 슬몃 발걸음을 옮기면

나도 흰 뼈의 생애를 가질 수 있을까

 

가까워서 오히려 멀어지는 빛이여

 

자작나무 위에 자작나무

장대비 위에 장대비

구름 위에 구름

하늘 위에 하늘

 

닿을 듯 가까이

꿈인 듯 아득히

 

눈앞의 저 흰 빛을 걷어내면

영원을 볼 수 있을까

 

장대와 비 사이에 서서

젖은 손을 흔들면

 

가까워서 오히려 멀어지는 흰빛처럼

 

자작나무를 보고 있어도

나는 끝내 자작나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지폐의 감정  

 

   

지갑에서 신권 지폐를 꺼내다가 손가락을 베였는데

나는 왜 아프지 않았을까

 

자폐아의 머릿속처럼

고요하게 혹은 날카롭게

나도 진화하고 싶었던 것일까

 

손에서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호주머니로

자세를 바꿔가며

지폐는 조금씩 헐기 시작한다

 

손을 탄다는 건

지폐와 지폐 사이에 꽃이 핀다는 것

빈틈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숨결을 나눈다는 것

 

온몸 구겨지며 살아가는 일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지폐는 피 맛을 보며 낡아가고

피 맛을 아는 돈은 함부로 배신하지 않는다

지폐는 지폐를 베지 않는다


 

고래의 귀환

   

 

향유고래 한 마리가 만삭인 채로 입항하고 있다

깊고 깊은 뱃속,

그 푸르른 등뼈 아래

눈부신 여명의 심장 박동소리가 들린다

 

사는 동안,

내게도 저런 포만이 있었나?

어둡고 막막한 뱃속에서 아껴 쉬었던 숨결

포기할 수 없는 생의 음파

한 호흡을 채우기 위해

날카로운 허기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집어삼켜야 했던가

 

출렁이는 무덤 속에서의 잠행

높은 파도 위에서

신생의 지느러미로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도 했다

가끔 외로움에

방향타를 놓치기도 하면서

 

내가 건져 올리고 싶던 모든 것들

헛된 욕망들까지 비워내고 나서야

비로소 차오르는 생의 포만

 

만삭의 몸을 밀고 들어오는 고래가

새벽항구를 깨우고 있다

 

셔틀콕의 외출

 

 

목련나무 가지 위에 걸려 있는 셔틀콕

한 마리 꽃처럼 앉아 있다

꽃을 잃어버린 목련나무에

또 꽃이 피었다

활짝 입을 벌린 꽃 속의 고요

절정을 꿈꾸던 날개가 깊은 허공에 박혀 있다

목련 가지 위에

빗방울 잠시 잠깐 앉았다 가는 사이

속도를 잃어버린 셔틀콕이

콕, 콕,

허공을 쫀다

침묵을 문을 부수고

오래 참아온 앙다문 입을 벌린다

꽁지를 간신히 세우고 접힌 날개를 들어 올리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뒤집는다

남아 있던 마지막 깃털 하나가

투둑

바닥을 친다

 

  

조영란

서울에서 나서 원주에서 살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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