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 : 달아나는 밤-약간 李箱풍으로 외 / 강건늘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



달아나는 밤-약간 李箱풍으로 외


강건늘   

 

 

첫 번째 골목에서 20대가 달아난다

두 번째 골목에서 20대보다 빠른 30대가 달아난다

세 번째 골목에서 30대보다 빠른 40대가 달아난다

다섯 번째 골목에서 50대인지 60대인지 모르는 이가 달아난다

여섯 번째 골목에서 첫사랑이 진눈깨비와 함께 휘날리며 사라진다

일곱 번째 골목에서 색이 바랜 일기장과 함께 센티멘털리즘이 달아난다

여덟 번째 골목에서 언독 위의 별들이 무더기로 내려와 빛을 잃으며 사라져간다

아홉 번째 골목에서 젊고 건강한 엄마가 달아난다

열 번째 골목에서 푸른 모과나무가 잎사귀들을 뚜욱 뚜욱 떨어뜨리며 달아난다

열한 번째 골목에서 노랗고 붉은 잎사귀들이 까르르 까르르 나뒹굴며 달아난다

열두 번째 골목에서 순한 양들이 달아나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먹구름으로 변한다

열세 번째 골목에서 집채만 한 코끼리가 길을 막고 있다

어찌할 바 몰라 산득해진 이

미로처럼 막힌 골목 한 귀퉁이에서

참새처럼 쪼그려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아난다

달아난다

달아 난다

달이 난다

둥근 달이

난다

 

둥근 달 안에

흩어진 직소퍼즐 조각들

바람이 하나씩 하나씩 끼워 맞추고 있다


 

재봉사가 초록 위를 지날 때-드뷔시의 ‘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흐르고  

 

 

재봉사가 지나간다

하늘과 구름들을 수선하러 다니는

꿈 많은 소년의 아버지

나풀나풀 커다란 날개를 파닥거리며

힘차면서도 순하고 다정다감하게

재봉틀이 돈다

 

하얀 천 조각들로

해진 팔꿈치와 뜯어진 무릎이 누벼지고

세상의 모든 시곗바늘은 해진 시간을 꿰매고

구름처럼 살찐 토끼가 소파 구석에 앉아

콧속까지 무성하게 덮인 피곤의 풀을 야곰야곰 쉼 없이 뜯고 뜯고

나는 톰슨가젤을 지켜보는 치타처럼 조심스럽게

코를 고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베란다 너머로는 초록들판 위 평화를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 속 목동이 소를 먹인다

사슴이 자꾸만 숲으로 도망가는 것이 싫어 소를 그린다고

안단테 칸타빌레로 초록을 뜯고 바람은 초록을 칠하고 칠하고

표백된 마음들 꿈의 흔적들 모여 있다

젊은 시절 엄마의 블라우스처럼 봉긋봉긋 그 사이로

발가벗은 천진한 태양의 아이들은 몸을 숨기며 술래잡기를 하고

가장자리에 앉아 장난감 같은 작은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이 피리를 불며

모두의 태교음악처럼 모두의 자장가처럼

가난한 주황색 지붕 위로

쌔근쌔근 자는 아이의 숨결 위로

평화를 떨어뜨린다

군인부대 숲속 따스한 솔방울들 아래에서

피엑스에서 사 온 분홍빛 소시지가 엄마의 손에서 스르르 벗겨지던

그 몽글한 기억처럼

 

재봉사가 지나간다

나의 어린 시절 7장과 6절과

어른 시절 30장과 6절을 재봉하고

오후의 가장자리로 멀어져간다


 

11시 11분처럼 

 

   

   어린 풀들이 11시 11분처럼 곧고 반듯하게 자라난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11시 11분처럼

곧고 반듯한 비가 내린다 수도 없이 11시 11분들이 떨어진다 11시 11분과 같은 두 팔과 두

다리로 11시 11분처럼 나란히 한 곳을 응시하며 곧고 반듯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곧고 반듯

해서 너무나 곧고 반듯해서 1처럼 고독할 때가 많지 1과 1이 만나면 또 얼마나 고독해지는

가 11시 11분 그 눈물겨운 시간은 12시가 되기위해 49분 동안을 째깍 째 깍 시간을 들어 올

리고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산도 구름도 모른다는 그 아득한 꼭대기 12시에 이르면 저엄 점

아래로오 아래로 아아 아 허공을 밟으며 땅 구덩이로 떨어지는 토끼 아파트 난간으로 내던

져지는 텔레비전 이별의 통보를 받는 그 순간 그 아득한 추락 그러다가 또다시 다시금 꼭대

기를 향해 째깍 째 깍

 

   그래 11시 11분과 같은 우리들은 12시를 꿈꾸지 저어기 45도쯤 하늘을 바라보며 

 

 

궁들이 무너져내려요 

 

   

수많은 궁들이

세상에 그 수없이 많은 궁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붉은 눈물을 흘리며

붉은 비명을 지르며

 

베르사유 궁전보다

알함브라 궁전보다

천하룻밤의 이야기가 있는 궁전보다도

세상의 그 어떤 왕실과 귀족의 궁전들보다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완벽의 음악과 완벽의 평화와 완벽의 시간이

푸름처럼 존재하는

그런 더없이 완벽한

어떤 위험도 어떤 절망도

그 어떤 불안과 작은 두려움조차 없는

 

그런데,

그런데… 

어느 날 예고 없이

이유 없는 형벌이 찾아와

이슬처럼 옅은 몸이 순식간에

싹 둑 싹둑

사지가 잘리고 찢기고 바스러지는

소리 없는 비명

아무도 모르게 철저히 비밀스럽게

끔찍한 살육, 살해가 벌어져요

 

어떤 죄를 지었길래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길래

그 어떤 심각한 죄명이길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푸름들과

푸름을 사랑하는 옅은 마음들은

눈물을 흘리고

세상의 모든 찢기고 부서진 궁들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려요

 

그렇게 매일같이 궁들이 무너져 내리고

푸름은 빛을 잃어가도

세상은 너무나

너무나 조용해요


 

잠만자는방있읍니다    

 

   

골목길 안 초록색 대문

‘잠만자는방있읍니다’

추위에 떨며 한데 모여 있는 글자들

‘습’의 옛 추억인 ‘읍’을 간직한 채,

잠만, 오로지 잠만

아침부터 밤까지

씻고 먹고 생각하기도 거부하고

오직 잠만 자야 하는 방

 

잠을 깨울까 조심스럽게 낮은 도 음으로 문을 두드린다

집주인은 병명을 모르는 병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빛을 등지고 있는 어둑한 정원

푸름을 잃은 줄기와 잎들

작은 새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도도한 척하면서도 불안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는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방이지요 잠 이외에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제 없는 장편의

근심이나 슬픔 따위로 습기가 차서 곰팡이라도 생기거나 방이 무거워져 균열이라도 생기

거나 하면 곤란하지요 그리고 되도록이면 친구나 티비 컴퓨터 핸드폰은 피해주세요 당신

을 더욱 외롭게 만들 뿐이니까요 이 방은 오로지 잠만 자는 방입니다 그래서 방세도 싸지

요 대신 방음과 빛 차단은 확실히 해드립니다 보세요 단단하고 견고한 벽이지요

 

주인의 입에서는 오래된 눅눅한 낙엽 냄새가 났다

 

거실 벽 중앙에는

‘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강건늘 시인 약력

1978년 경기 포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진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