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애지 신인문학상 수상작 : 잉카 너머 숲을 짓다 외 4편 / 백승자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애지 신인문학상 수상작>




잉카 너머 숲을 짓다 외 4편


백승자

 


그대, 돌로 쌓은 축대에 흙을 담아요 토실토실 알맹이만 잉태하는 흙을 가득 채워요 알몸으로 품어도 할퀴는 자식은 없어야 해요 잔뿌리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유선(乳腺)에 닿으면 물길이 열리고 숲도 자라겠지요

그대, 피사로*의 쇠가 돌을 빻아대며 숲을 삼키던 밤 그 긴 밤의 악몽을 기억하나요 단 하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쇠의 춤사위가 현란할수록 깊어지던 비명소리들 날카로운 칼끝이 천 년의 꽃잎들을 희롱하며 눈발처럼 떨어뜨렸지요 숲을 얼려버렸지요

 

초침만이 휘어져 흐르는 퍼런 강을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었어요

우리, 말해야 했나 봐요 수련처럼 피워내는 쇠의 꽃들이 수련은 될 수 없다는 걸요 마음에 수시로 돋아나는 가시가 쇠의 비릿내에서 자란다는 걸요 눈치 보며 숨겨온 말들 말간 햇살 속에 내어놓고 날개 돋는 소리 들어야 했나 봐요 하늘에 갇힌 삼천 명의 후아마크** 별처럼 내려올지 모르는데요

그대, 다시 축대를 쌓아요 보드라운 흙을 가득 채우고 바람을 불러요 그는 헝클어진 시력(時歷)을 바로 세우고 축제의 밤을 만들어 줄 거예요 그의 애무에 그 밤의 악몽들은 각자의 무덤에 잠들고 젖무덤만이 깨어나 피돌기를 시작할 거예요 생명들의 거센 호흡이 파랗게 숲을 짓고 스스로의 오독(誤讀)을 읽어내는 날이면 안개에 묻혔던 마추픽추 수줍게 웃으며 다가올 거예요

 


*잉카를 함락시킨 에스파냐의 원정대장
**잉카의 성처녀 여사제

 

 



가면의 辯

 

 

매일 부화하는 나는 늘 내 알레고리를 넘고 만다

 

낯선 나를 감당하는 일은 머리끝까지 감금하는 일

 

그들이 찾을 수 없는 성城에 갇히는 일

갇힌다는 건 달콤한 비밀을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

 

내 추락한 유희를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벽마다 밤낮없이 써 내린 유서 같은 기록들

 

지친 혼잣말이 사방 벽을 때리다 시들어가는 꽃이더라도

 

꺾이지 않고 스스로 침몰할 때를 얻는다는 것

 

그들의 나이테에서 추방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쩌다 멋모르는 망치질이 벽에 숭숭 구멍을 내더라도

 

빨간 장미 그려진 가면 하나 쓰고 말면 그 뿐

 

빼곡한 가면들에 얼굴을 잃어버린다 해도

 

버텨내기 위해 쓰는 내 가면의 시간은

 

시시한 변명보다 향기로와라

 

 

 


 

 

그녀는 한 번도 고지告知 받지 못한 번호에 묶여 있다

 

애초에 선택권을 박탈당한 피사체

지문 번호를 고르는 건

신의 앵글에서 사라지는 일

태어나자마자 숫자의 거미줄에 갇혀

반항을 모르는 포로가 되었다

 

삶의 스텝마다 도사리고 있는 늪의 더듬이들

처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1로 태어나 2로 살면 안 된다는

99보다 100이어야 한다는

 

봄에 서서

가을의 문고리를 열고 있는 그녀

數는 늘 주관적 흐름이었다

끝없이 숫자를 복사해내는 시간은

뫼비우스띠를 그녀의 발목에 채우고

순한 포로를 한사코 채찍질하고 있다

 

앞으로만 달리는 경마

그녀는 마지막 번호를 꿈꿀 수 있는가

 

 

 


숨은 그림 숨기기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껍질

단단하거나 무르거나

오래도록 숙성된 이유 있는 포장이지

 

숨겨야 하는 그림자가 짙을수록 화려해지는 껍질의 순도

무른 시간 찔린 핏빛의 고백이나

그 여름 폭풍 같던 금지된 사랑의 파편이나

거뭇하게 자란 아픈 그림들은

12월의 해처럼 웃어내야 했지

 

수술대의 자식 앞에서 흘리던 아버지의 헤식은 웃음

마지막 잎새를 잃고 재잘대던 딸아이의 수다는

위태롭던 껍질의 단단한 껍질이었음을

내 울의 등고선은 고비고비 되새김질 했지

 

껍질이 빨개질수록

속살은 하얘질 수 있다는 사과의 속내를 알고부터

뱉는 순간 날아가는 말의 심장을 잃고부터

나는 매일 숨기는 도리를 배우지

 

여백 없는 화려한 화첩에서

내 숨은 그림들은 오늘도 평화롭지

 

 

 


뼈가 사라지는 숲



숲의 나무가 무너지는 건

힘이 약해서가 아니다

속삭임처럼 뿌려진 비의 속임수 때문이다

미네랄 속에 감춰진 비상砒霜이 흔든 균형 때문이다

물을 마실수록 잃어버리는 뼈의 골밀도

나무를 나무이게 하는 뼈가

하얗게 날아가고 있다

관절에서 척추에서 바람의 방향에서

돈의 철학에서 웃음의 추에서 칼의 논리에서

뼈는 척수를 놓쳐버리고 혈관을 찔러

물길마다 피로 물들인다

풀들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물가에 쓰러져버리고

무너진 나무들의 관절은 까맣다

연골을 빗물에 쓸려보내고 버텨온 시간이

흐름을 멈출 때마다 타버린 흔적이다

나무는 골수에 새겼어야 했나 보다

울이 되어줄 거라던 숲의 오래된 약속과

풀들에게 쥐어준 파라다이스의 지도가

뜬구름이라는 꽃의 벙어리 같은 고백을

 

뇌섬*을 자극하는 바람의 말들이

오로라 속에 갇혀

오늘 사원은 고요한 불통의 시대다

 

*뇌섬 : 사회적 불공정이나 차별에 대해 느끼는 역겨움이나 분노를 관장하는 곳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