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시작 신인상 수상작>
속기 외 4편
배지영
나는 당신을 아주 빠르게 받아 적는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질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비의 착상이었기에
모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볍게 넘기며
어떠한 점과 글자들이 지나가고 기록이
너무 빠른 나머지
스케치를 하듯이
당신은 이제 선 하나로 설명이 된다
추상적이다 피카소의 소처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안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지긋지긋하게도
거의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이다
모닝 베이커리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 허벅지
안쪽이 붕 뜨는 기분이다
달달하게 반죽한 밀가루가
오븐에 부플어 오른 것처럼
금방 꺼내어 펄펄 뜨거운 상태도,
아주 식어사 차갑게 바삭바삭
바스라져버리는 상태도 아닌 미적지근한 온도
말랑한 겉 부분과
습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찬 그곳
고소한 냄새
서로의 손이 깍지를 끼면
어린아이의 손과
요리의 끝을 맺는다
등줄기에 매달린 당신과
좋은 하루의 작별키스를 한다
아직도 난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한 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당신의 품은
따뜻한 집이자 짐이다
꽃자리
내가 사랑한 건 까마귀였다
할머니는 깨를 볶아 대야에 담았고
고양이는 거기에 똥을 쌌다
신이 일하지 않는 돼지의 긴 코를 잘랐다
오빠는 자르지 않은 연근을 던진다
등 굽은 검은 염소의 호흡이 무너지면
검불은 어김없이 타오른다
입술 색이 같은 여고생들이 떼로 몰려오자
자궁 속에서 밤나무가 자랐다
은하수가 유성의 닻을 애만지고
매미 위에 기름공이가 고깔춤을 추자
가을 햇덧에 서리병아리가 태어났다
씨 없는 처녀 땅은
살꽃 한번 못 피우고
흉터 같은 그늘만 솟아난다
떠돌이 여자의 몸이고 싶다
과조*
너는 어쩜 눈이 이렇게 기니
감은 눈 위로
알록달록 색깔을 칠하며
네 성병에 대해 침묵했던 그 시간
자, 봐봐 하고 손거울을 건네자
너는
바닥에 반사된
한 뼘 정도의 빛에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곧 죽을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너
그랬니, 그랬니, 대답하다가
다 담지도 못할 말이 쏟아져
내 살에 도로 붙었다
삶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라는 말은
배 속에서
산산이 찢어두기로 한다
*볕이 적게 비치다
기질
입을 벌려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할까
시청 입구에 큰 붕어는 하루에도 멏 번씩 고민을 한다
그게 오래된 고민이었다는 것조차 계속 잊는 듯
무엇 하나 뱉지도 삼키지도 않는 입질을 계속했다
입을 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내밀었다가
말아 넣었다가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게만큼이나 짓눌리는 액체의 부력을
최대한 친화적으로 참아내려
붕어는 정확한 발음이라는 걸 하려다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을 불행함에 몰입했다
턱의 기억이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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