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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발칸반도

몬테네그로 코토르, 아드리아 해안의 휴양지

by 혜강(惠江) 2016. 4. 28.

 

발칸여행(13)

 

몬테네그로  코토르(Kotor)

 

휴식과 위안을 주는 아드리아 해안의 휴양지

 

 

글·사진 남상학

 

 

 

  알바니아에서 북쪽으로 달려 국경을 넘어서면 몬테네그로다. 북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쪽으로는 세르비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아드리아 해에 면하여 있다. 국명은 세르비아어로 '검은 산'을 뜻하며  디나르알프스산맥의 경사면에 가려 어두운 산지가 많기 때문에 붙여졌다.  

 

  1946년 구유고슬라비아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이었다가 1992년부터 신유고연방에 속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등 주변국 내전에 개입하고 코소보사태와 인종청소 등의 문제를 일으키며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경제제재를 받자, 같은 연방국인 몬테네그로도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졌고, 이것이 신유고연방을 해체하고 독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르비아와 신유고연방을 결성하였고, 다시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하였다. 수도는 포드고리차. 

 

  이후 2009년부터 NATO 가입을 위한 수속을 진행해왔으나, 기존 NATO 회원국인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는 고대로부터 그리스 자국의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국명(國名)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가입을 거부하고 있어 NATO 가입이 보류되고 있다.  

 

 

 

 

 

  몬테네그로에 들어선 우리는 몬테네그로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코토르(Kotor)로 이동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천국에 있는 것인가 혹은 달나라에 와 있는가?”라고. 코토르는 코토르 만(Boka Kotorska, Bay of Kotor)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자(垓字)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요새 도시다.

 

 만이 워낙 깊어서 옛날부터 해적들의 은거지(隱居地)로 용이했기 때문에 이들의 침입과 약탈을 막고자 성을 쌓고 쉬쿠르다(Škurda) 강을 이용해 해자를 만들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요새 코토르는 깎아지른 듯한 로브첸(Lovćen)  대산괴(1,749m)의 기슭에 있다. 하늘에 닿을 듯 끝없이 이어진 검은 산맥들과 험산 고봉이 사람을 압도한다.

 

  코토르의 국토는 검은 산처럼 짙고 울창하며, 도시 역시 고색창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잔잔한 바다 호수가 여행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치유한다. 그런 점에서 코토르는 분명 두 얼굴을 가졌다고나 할까?  구도심은 4.5㎞에 달하는 성 요한 요새로 이뤄져 있고, 구도심 내부의 건축물 색상과 바닥의 문양, 상점의 테라스 형태까지 중세의 것을 재현한 듯 대부분 비슷하다. 그래서 코토르는 몬테네그로에서 잘 보존된 중세도시 중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코토르 구시가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코토르 구시가지의 석조 건축물들은 정연하며 고색창연하다. 성문을 지나 올드타운으로 진입하는 여행자의 마음은 즐겁다. 코토르 성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으로 들어가려면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성의 북쪽에 있는 북문은 쉬쿠르다 강으로 통하기 때문에 강문(江門)이라고 하며 1540년에 세워졌고, 남쪽에 있는 구르디차 문은 13세기에 세워져 18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시가로 들어가는 정문 역할을 하는 서쪽의 '바다의 문(Maritime Gate)' 1555년에 만들어졌으며, 옛날에는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바다와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매립하여 육지가 되었다. 코토르 성 서쪽의 '바다의 문' 위의 코토르 문장(紋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Tuđe nećemo, svoje ne damo.

(What belongs to others we don't want, what is ours we will never surrender.)'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것을 결코 남에게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유고연방의 통치자였던 티토(Tito) 대통령이 쓴 것이다.  코토르 시계탑은 코토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1602년 도심의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진 이 시계탑은 1667년 지진으로 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시계탑을 똑바로 세웠지만 1979년 지진으로 다시 기울어졌다. 바로크 양식을 일부 사용하였고, 북쪽과 동쪽 면은 고딕 양식을 반영한다. 시계탑 아래에는 죄인을 두어 코토르 시민이 그의 얼굴을 알 수 있도록 한, '수치의 기둥(Pillar of Shame)'이 있다.

 

  성 트라이폰 성당(St Triphon,s Cathedrale), 성 리콜라스 성당(Serbian Orthodox Church of St. Nicholas), 성 루카 성당이 이곳에 있다.  성 트라이폰 성당은 8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나 1166년 코토르의 수호성 성 트라이폰의 유해를 이스탄불에서 가져와 안치한 이후 성 트라이폰 대성당으로 개축 되었다.

 

 

 

 

 

   마을 전체를 둘러보는 데 30분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은 마을이지만, 포석이 정연하게 깔린 반질반질한 돌 바닥도 발걸음에 작은 행복을 더해주고, 석조건물들의 정연하고 고상한 자태는 잠시도 고개를 떨굴 수 없게 한다. 

 

 길 잃을 염려도 없는 작은 성벽도시 코토르는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거닐며, 골목을 기웃거리는 묘미가 쏠쏠하다. 오랜 역사의 낭랑한 흔적이 전해주는 기품 있고 고상한 위로일 것이다.

 

 

 

 

 

 

 

 

 

* 성 트라이폰 대성당 * 

 

 

  * 성 리콜라스 성당(러시아정교회) *

 

 

 

 

 * 성 트라이폰 대성당 앞에 있는 루카정교회 *

 

 

 

 

 가파른 암석지형 4.5㎞에 이르는 성 요한 요새

 

 

  그러나 코토르의 아름다운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산 정상 위에 우뚝 선 성 요한의 요새를 향하여 올라야 한다. 중세도시 코토르를 보호하던 성벽은 가파른 암석 지형을 타고 4.5㎞에 이르며, 성벽의 높이가 20m에 이르는 곳이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성곽, 탑, 성채, 대문, 보루, 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새를 올라가는 길에 1518년에 건축된 치유의 성모마리아교회(Church of Our Lady of Remedy)를 만날 수 있다.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고대국가 일리리아(Illyria)부터 시작하여 비잔티움, 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거쳐 180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넘어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리리쿰(Illyricum), 비잔티움,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의 축성법이 혼합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구조는 대부분 베네치아 시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성벽은 코토르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계단을 하나둘 오르며, 차츰 시야에서 색다른 풍경들을 쏟아내는 코토르의 위용이 하나씩 얼굴을 드러낸다. 

 

가파른 돌계단들을 밟고 정상 위에 우뚝 선 성 요한의 요새에 서면 어떨까?   항구와 성채, 요새의 성곽들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도시의 모습은 온전한 형체를 드러낼 것이다. 표현할 길 없는 코토르의 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매인 단체 여행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바닷가로 나오니 도시는 물론, 저 멀리 아드리아 해, 코로르 내항으로 진입하는 선박들과 요트들의 풍경이 손끝에 잡힌다. 평화로운 선착장은 범선과 유람선, 소박한 어부들의 낚시 배들이 어우러져 평화롭고 정겹기 그지없다.

 

  찰랑거리는 바다와 평온한 마을 풍경이 여행자의 고단함을 싹 날려주는 곳. 정상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고스란히 감동의 선물이요, 그 자체가 힐링이다. 성채의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이 도시의 형체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고색창연한 좁은 골목을 걷노라면 묵직한 세월의 두께가 역사와 자연 속에 드러난다. 나의 발길은 성의 북쪽에 있는 문을 통해 성밖으로 나가 ​해자 역할을 하는 쉬쿠르다 강 위에 놓인 다리로 이어졌다. 북벽(北壁)은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포석을 밟으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자는 수천 년전의 그 깊은 회한과 그리움, 추억과 무수히 많았던 인간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고 지금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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