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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발칸반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주변, 차우셰스쿠의 흔적이 뚜렷

by 혜강(惠江) 2016. 4. 25.

 

발칸여행(07)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 

-  차우셰스쿠의 흔적이 뚜렷

 

 

글·사진 남상학

 

 

 

 

 

 

  1881년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한 루마니아왕국의 수도로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확장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더욱 발전했다. 1947년 루마니아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1965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호를 고쳤다.

 

  특히 1948년의 토지 국유화 이래 대규모 사업계획들이 추진되었으나 1977년 3월 4일에 심한 지진이 발생하여 약 1,400명의 사망자와 7,6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주택과 건물들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989년 12월 차우세스쿠 정권의 철권통치는 붕괴되고, 1989년 차우세스쿠는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 중심가에는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국민관 차우셰스쿠 궁전, 독재자 차우세스큐가 최후의 연설을 한 공산당 본부, 역사상 중요한 크레추레스쿠 정교회(1722), 혁명광장 등 볼거리가 많다.  

 

 

◆ 민주화의 현장 ‘혁명광장’과 구 공산당 본부 

 

 

  부카레스트 빅토리에 거리 남쪽에 있는 이 광장으로, 1989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2월 혁명이 일어났던 곳이다. 애초에 이 광장은 화재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동에서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공화국 광장' 또는 '공산당 본부 앞 광장'이라고 불렸고, 198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혁명의 광장에는 현재 상원 의회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구 공산당 청사가 있다. 과거 1989년 12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이곳 공산당 청사 건물 옥상에서 최후 연설을 했다. 1989년 12월 21일 정오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연설이 5분 만에 중단되고, 대통령 지지 관허 집회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면서 루마니아 12월 혁명이 발발했다. 차우셰스쿠는 이곳에서 허겁지겁 백색 헬기를 타고서 도망친 장소로 유명하다. 

 

 

 

 

 

 

   차우셰스쿠는 1965년부터 1989년 12월 국민들의 시위로 축출되기 전까지 루마니아를 호령했던 독재자다. 그는 재임 중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모방한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철권통치를 감행했다. 또한, 국민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음에도 초호화 생활을 누렸으며, 자신의 정적과 야권 인사들을 집단 학살했다. 

 

  그러다가 1989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틀간 진행된 시위와 총격전 끝에 시위대가 루마니아 국영방송국을 장악했고, 당시 시위 장면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방송되었고 후에는 전 세계에 방송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에는 지금도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격렬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의 유혈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붕괴했다. 12월 25일에는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는 도주하다 붙잡혀 결국 12월 22일 총살을 당했다. 기관총으로 난사 당한 비참한 최후였다. 혁명 이후에도 공산당 간부들이 여전히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반뿐인 혁명’ ‘도둑맞은 혁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루마니아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26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에서는 독재가 계속되고 있다. 혁명광장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삼각형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는데, 1989년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혁명 기념비이다. 기념비에는 1989년 당시 총격으로 죽은 희생자의 이름이 광장 벽에 새겨져 있다. 매일 관광객이 찾아와 역사현장을 둘러보는 장소가 되었다.  

 

 

◆ 루마니아 정교회인 크레출레스쿠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인 크레출레스쿠 정교회는 혁명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카레스트 빅토리에 거리에 있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와 그의 아내 사프타가 세웠고,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스쿠(Gheroghe Tattarescu)가 내부 벽화를 그렸다. 1720부터 1722년 사이에 건물이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는 그보다 100여 년 뒤인 1859년부터 1860 사이에 그려졌다.

 

  건물 옥상의 세 개의 십자가는 가로대가 세 개가 있는데, 동방 정교회 십자가는 가로가 세 줄이란다. 동방 정교회 주교들은 가로대가 하나 있는 십자가를, 대주교들은 가로대가 둘이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고 하며, 교황만이 가로대가 세 개가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고 한다.  

 

 

 

 

  

펜타곤 다음으로 큰 건물인 차유세스쿠 궁전

 

 

   세계 단일 건물로선 두 번째라는 차우셰스쿠 궁전(일명 인민궁전)은 루마니아의 명물이자 훗날 훌륭한 유산이 될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북한식 독재를 수입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북한의 주석궁을 따라 지었다는 인민궁전은 28살 여성 건축가 안카 페트레스쿠(Anca Petrescu)가 수석 설계자로 참여하여 1965년에 건축을 시작하였다.

 

  값비싼 자재로 지어진 이 궁전은 오로지 차우셰스쿠 부부를 위한 공간이었다. 건물에 사용된 샹들리에 수만도 2,800개를 훌쩍 넘는다. 방 수는 최대 1,100개 정도로 추산하는데, 내부는 온통 이탈리아산 고급 인테리어 수제품인 무라노 글래스와 거울, 복도고 방이고 간에 천장 전등에는 무조건 상들리에가 달려있고, 화려한 색상의 모자이크, 최고급 장신구들로 치장됐다. 

 

  또한, 실내수영장, 영화관, 지하벙커 시설 등을 갖췄으며 넓은 정원에선 공작새들이 거니는 등 화려함의 극치였다.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지은 화려한 건물은 독재자의 폭압적인 통치로 탄생한 것으로 평범한 국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베여 있다.

 

  그러나 1989년 루마니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차우셰스쿠는 하루도 이용해보지 못하고 총살당해 죽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건설은 중지되었다.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는 대부분이 완성된 상태였고, 마치지 못한 부분은 외관과 정원, 내부를 꾸미는 미술품과 가구등의 내장 정도였다. 현재는 미완성인 상태로 일부 층은 국회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관광과 장소 대여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광은 할 수 있으나 공항 검색대와 같은 금속탐지기가 마련되어 있고 한번에 일정 인원수 이상이 관람할 수 없다. 게다가 관광 입장시간이 딱 정해져 있고, 모든 코스에는 가이드가 따라붙으며, 방을 이동할 때마다 가이드는 일일히 관광 인원을 센다. 워낙에 넓어서 관람객이 길을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어렵고, 1~2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국회가 사용하기 때문에 패키지 형태로 루마니아에 잠깐 들르기 위해 왔다면 관광하기가 상당히 힘든 편이다.

 

 

 

 

 

    인민궁전 앞으로 4Km에 걸쳐서 뻗어있는 통일대로는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여 부카레스트의 샹젤리제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분수가 41개나 설치되어 있고 그 양쪽에다 보리수나무를 심어놓았으며 그 바깥쪽에는 10층 높이의 건물들을 연속해서 지어놓았다. 우리는 궁전 맞은편 광장 쪽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우남일 교장 부부와 장호찬 교장, 그리고 우리 부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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