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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강화역사박물관에서 강화 5천년 역사를 한 눈에 보다

by 혜강(惠江) 2014. 10. 28.

 

강화역사박물관

강화 5천년 역사를 한 눈에 보다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032-930-3114)

 

·사진 남상학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부근리)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은 2010년 10월 23일에 개관하였다.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 보존·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총 사업비 140억 원이 투입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고인돌공원내 1만 5천여㎡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 건축면적 4천200㎡ 규모로 지어졌다.

  옛 강화역사관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갑곶돈대에 있었다. 역사관을 둘러보고 난 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 조선 말엽 서구 열강의 침탈 현장을 차례로 둘러보는 답사여행의 교과서 같은 코스였다. 하지만 역사관의 규모가 작아 강화도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없을뿐더러 근대 역사에 치우치는 답사여행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 2010년 고인돌공원으로 확장 이전하고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흔히 강화도는 역사 문화유적의 보고(寶庫)로 불린다. 선사시대를 비롯해 삼국·고려·조선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분포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강화도의 지정학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화는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위급할 때 왕실과 조정이 피란해 전란을 극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주변국에서 내륙으로 문화와 물자가 드나드는 주요 길목이었다.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이 전국적으로 산재한 역사박물관 중에서도 유독 주목을 받는 것은 이 같은 특수성 때문이다.

  강화는 각 시대마다 해상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훌륭한 문화유산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그동안 강화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관할 데가 없어 외부 기관에서 관리해 오던 실정이었다.

  2개 층으로 구성된 강화역사박물관은 1층 매표소에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 선사시대를 먼저 둘러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고려, 조선시대를 차례로 만난다.  우선 1층 로비에는 강화역사박물관의 보물 제11-8호인 강화동종이 있고 바로 옆에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장군의 수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강화 갯벌의 간척 역사가 담겨있는 선두포축언시말비가 있다. 

 

 

 

2층 :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 전시


  먼저 2층으로 가보자. 박물관 2층은 구석기부터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체험힐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선사시대 유물은 다양하다. 전체 전시 유물 3841점 가운데 30%가량이 선사시대 것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대별로 전시된 석기와 토기이다. 전시된 유물들은 강화에서 출토된 것이라서 더 관심 있게 볼 수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있는데 국사책에서 보던 주먹찌르개, 반달돌칼, 간돌 화살촉도 있다. 그 옆에는 기증·기탁된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문명의 여명기인 신·구석기시대에 대륙의 문화가 바닷길을 따라 한반도로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선사유물은 강화도를 비롯해 인근 섬인 덕적도, 삼목도, 영종도 등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섬 지역에 널리 퍼져 살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주거지 모형이 여러 형태로 재현돼 있다. 이 시대 유물은 반달도끼, 주먹도끼, 돌망치, 주먹찌르개, 청동숟가락, 어망추,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이 주를 이룬다. 다양한 종류의 석검과 돌화살촉도 크기별로 비치돼 있다.

  삼국시대 유물은 철제갑옷, 청동초두, 허리띠고리, 마구, 발걸이 등 주로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삼국시대에 강화는 주로 백제에 예속돼 있었다. 유물의 형태가 백제문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층 : 고려, 조선 근대의 강화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과 역사적 사건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고 려시대로 넘어가면 유물이 보다 다양해진다. 고려 말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 60년간 임시 수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철제투구를 비롯해 금동좌불상, 동경(거울), 경문금고(타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다. 청자류인 병, 잔, 접시 등은 창후리 고분군에서 다수 발굴되었다.

  고려청자는 대개 전라도 강진이나 부안에서 생산돼 공물 또는 상품으로 서해의 조운로를 따라 강화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강화도 시기는 고려청자의 전성기로 불린다. 강화에 있는 고려왕릉 4기에서 출토된 항아리, 수막새, 석인상, 잡상 등도 전시됐다. 고문서인 대장경, 동국이상국집, 강도고급시선, 시권 등은 당시 인쇄문화 발달상을 잘 보여준다.


 

 

강화도 수난의 역사 - 5진 7보 53돈대



   조선시대 유물도 국난 극복사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말엽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강화도가 철저하게 유린되는데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침략하는 장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펼쳐진 미군과 조선 관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미양요를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실물 크기의 수자기가 걸려 있어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병인양요(1866년) 당시 강화 수비군이 재래식 무기로, 첨단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정족산성 전투 장면도가 음향 설명과 함께 배치돼 있으며,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모형은 너무 생생해 당시 협정 현장을 보는 듯하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를 구실 삼아 프랑스가 침범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를 빌미로 미국이 침범한 사건이다. 침략한 나라와 이유는 다르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약탈과 환수의 과정이 꼭 닮았다. 프랑스는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조의 의궤와 고서를 약탈했고, 미국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외규장각의 조선왕조 의궤는 2011년 14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고, 수자기는 136년 만인 지난 2007년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돌려받은 기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숨겨진 이면에는 서글프고 처참한 조선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라 불리는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가슴에 새겼던 조선 효종이 북벌계획의 하나로 설치하기 시작해 숙종 때 이르러 완성한 5진 7보 53돈대다. 그중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다.

  함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은 조선의 화포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초지진을 내준 이튿날 덕진진과 광성보도 함락되었다. 어재연 장군 휘하 천여 명의 조선 관군은 부상으로 오도 가도 못한 몇몇을 빼고 모두 전사했다. 조선군 진영에 내걸렸던 수자기는 성조기로 대체되었다. 신미양요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숙연해진다.

  지금도 초지진의 성벽과 소나무에는 전투 당시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초지진은 덕진진, 광성보와 함께 강화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답사여행의 필수 코스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에 이르는 강화나들길의 2코스 호국돈대길(17km)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통한옥과 다양한 목가구, 민속품 상설 전시



  강화역사박물관에서는 서화전, 고려청자와 무기류 전시, 한복 전시 등 기획전시 및 교육,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강화역사박물관에는 역사 관련 유물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통 한옥과 다양한 목가구, 민속품 등을 상설 전시하고 있어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옥은 유교적 덕목에 따라 남녀의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데, 강화역사박물관에 재현된 한옥은 안방과 사랑방, 누마루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로 의류를 보관하는 장(欌)과 농(籠), 책과 문서·의복 등을 보관하는 반닫이, 화장대인 빗접, 귀중품을 보관하는 함(函) 등의 가구를 전시했다. 사랑방은 주인이 거처하는 방으로 주로 글을 읽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각종 문방 용품과 문서 등을 보관하기 위한 문갑(文匣)과 책상인 서안(書案), 종이와 붓·먹을 함께 넣을 수 있는 연상(硯箱) 등의 가구를 배치했다. 누마루는 대개 사랑방과 이어져 있는데 집주인이 글을 읽거나 손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다. 

 

 

 

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을 만나다, 부근리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 건물 맞은편은 고인돌공원이다. 광장 중앙에는 높이 2.6m, 길이 7.1m, 너비 6.5m, 무게 80t에 달하는 남한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세계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돌을 고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고인돌은 흔히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만 3만 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고, 북한에 있는 고인돌까지 합치면 4만여 기가 넘을 만큼 많이 분포하여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하다. 전북 고창, 전남 화순과 함께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이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화도에는 주로 고려산 기슭에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고창이나 화순의 고인돌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고인돌 이미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인돌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고인돌이 이곳 고인돌공원에 남아 있다. 일명 부근리 고인돌로 불리는 것이다. 이 고인돌은 2개의 고임돌 위에 덮개돌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다. 그 모습이 마치 탁자를 닮아 탁자식 고인돌로 불리는데 높이만 2.5m, 덮개돌 무개만 50여 톤에 이르는 대형 고인돌로 당당하기 그지없다.

  고인돌은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뉜다. 그중 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땅 위로 노출되는 고인돌이다. 그러다 보니 탁자식 고인돌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굴되고 훼손되기 쉽다. 지금의 부근리 고인돌은 2개의 고임돌과 1개의 덮개돌로 구성되어 있지만, 원래는 4개의 고임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굴되고 훼손되어 빈껍데기만 남은 고인돌을 만나는 셈이다. 이유야 어떻든 부근리 고인돌은 한 바퀴 돌아가며 둘러봐도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위엄이 가득한 장군의 모습처럼 위풍당당하다. 부근리 고인돌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화문석문화관, 고인돌군(群), 평화전망대, 각종 돈대 등 연계 관광지들이 즐비해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적합하다.

 

 

◎관람안내

 

* 관람 : 오전 9시 ~ 오후 6시(매표마감 5시 30분) /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날 당일
* 요금 : 어른 1,500원, 어린이·청소년·군인 1,000원 /  무료 : 6세 이하 유아, 65세 이상 노인, 강화군민,  국가유공자 및 그 가족, 장애자 및 동반 보호자 1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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