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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촌 탐방(15) - 해공 신익희 가옥에서 한옥마을, 보안여관, 경복궁 영추문까지

by 혜강(惠江) 2014. 6. 28.

서촌 탐방(15)

 

해공 신익희 가옥에서 한옥마을, 보안여관, 경복궁 영추문까지

 


글 · 사진 남상학

 

 

 

육상궁에서 나와 무궁화동산을 거쳐 해공신익희 가옥과 통의동 한옥마을, 그 옆에 있는 보안여관과 영추문을 차례로 둘러보기로 했다.

 

 

해공 신익희 가옥

서울 종로구 효자동 164-2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까지 거주한 곳이다. 그의 유품으로는 목판, 고서, 휘호(친필), 놀이용 화살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가옥은 원래 현재의 장소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865년(고종 2)에 대홍수로 가옥 일부가 파손되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운 것이다. 건축물 대장에는 1925년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 와가로 겹처마, 팔작지붕, 오량가 집이다. 안채는 면적 60.2㎡이며 평면은 T자형이다.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에 부엌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면적 31.1㎡의 ㄱ자형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규모의 사랑방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19세기 또는 20세기 초 경기 지역의 도시형 한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집의 외벽과 내벽, 창호 등은 일부 변형되었으나 건물 구조는 건축 당시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2005년 2월 11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으며 해공신익희선생기념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신익희선생 고택 앞 골목에는 쌍홍문(雙紅門)이 있던 곳이다. 쌍홍문은 임천조씨(林川趙氏) 가문의 조원(趙援)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가 임진왜란 때 어머니가 위험에 처하자  목숨을 희생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두 개의 홍문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이르기를 이들 형제의 효행으로 인해 조원이 살던 집 앞을 '쌍효자거리'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어 오늘날 '효자동(孝子洞)'의 어원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통의동 한옥마을

 

   경복궁과 청와대 부근이라는 이유로 난개발이 억제된 덕분에 서촌에는 1950~6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이 작은 동네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을 다시 추억하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서촌은 북촌이나 삼청동, 인사동 못지않은 관광명소라는 명함이 붙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 마을이 됐다. 최근 한옥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서촌은 사람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그런데 북촌과 비교되는 점은 한옥 양식에서도 발견된다. 서촌 633채 한옥 대부분은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 한옥이다. 시인 이상의 옛집만 하더라도 1933년 주택 업자에게 팔린 뒤 145평의 집이 5개의 필지로 나뉘어 도시형 한옥으로 새로 지어졌다.

 

 

 

                                                                                             보안여관


서울 종로구 효자로 33, 종로구 통의동 2-1번지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의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길에는 붉은 벽돌의 낡은 이층 건물이 있다. '통의동 보안여관'. 아픈 현대사를 비춰볼 때 청와대 코앞에 ‘보안’이라는 이름의 여관이 존재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다. 1930년대 건립된 이 곳에서 시인 서정주는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고, 시인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과 화가 이중섭도 예술혼을 불살랐다. 2007년 숙박업을 접은 뒤 지금은 전시장으로 이용 중이다.  80여년 전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낡은 것은 없애고, 새로 짓는 데만 익숙한 서울에서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유리문을 밀고 여관에 들어서면 세월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쇠락한 여관의 냄새다. 나무 바닥이 삐그덕거려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천장은 낮고, 좁은 복도를 중심으로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객실 문에는 1호, 2호라는 호수가 적혀 있는 푯말이 붙어 있고, 벽에는 언제 박았는지 모르는 못 자리들이 나 있다. 손때가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어른 한 명 간신히 발 뻗고 누울 만한 쪽방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신문지부터 꽃무늬 벽지까지, 여러 번 도배한 벽면 곳곳이 뜯기고 찢겨 서로 다른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복도 끝의 공동변소,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 목조 뼈대가 노출된 천장…. 눈앞의 모든 것에서 수십 년 세월이 읽힌다. 2007년 숙박업을 접은 뒤 지금은 전시장으로 이용 중이다.  

  1930년대 건립된 이곳에서 시인 서정주는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고, 시인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과 화가 이중섭도 예술혼을 불살랐다.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14일 창간, 1937년 12월 1일 통권 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徐廷柱)였고, 제2호는 오장환(吳章煥)이 맡았다. 동인으로 제1호 때는 서정주·김달진·김동리·여상현·오장환·함형수·김광균 등, 제2호 때는 오화룡·이시복 등이 참여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우리는 우리 부락에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의 과실과 꽃과 이를 즐기는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한 점과 이 잡지에 실린 시들의 경향으로 보아 특정한 사조나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순수문학을 심화시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동인들을 '생명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정주의 〈문둥이〉·〈화사 花蛇〉,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오장환의 〈성벽 城壁〉·〈정문 旌門〉 등이 실려 있다. 여기서 '시인부락' 발간의 주역을 맡은 서정주의 <화사(花蛇)>를 감상해 본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 '시인부락' 2호(1936.12) 수록



  이제 가난한 예술가들로 가득 찼던 보안여관은 지금도 80여년 전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나 있다.  매년 실시되는 보안여관의 보수는 최대한 건물을 '보존'하는 선에서 이뤄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복합문화예술공간 통의동 보안여관은 '창문전시’에 참여할 작가를 모집한다. 창문전시는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하면서 보안여관이라는 정체성과 연계되는 작품으로 구성한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창문 사이즈는 가로 123cm x 세로 110cm x 깊이 100cm, 내부 공간 사이즈는 가로 175cm x 세로 195cm x 깊이 160cm로 이 공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희망자의 작품을 전시한다.

  2007년 이후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 한 뒤부터 '서촌'의 터줏대감인 보안여관의 객실에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들고 난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객실 안팎에 드로잉과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서촌 한옥마을을 지나 통인 시장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걷다 보면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이 나온다. 일제시대 영추문 앞은 전차의 종점이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離宮:궁정동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출처 : 두산백과)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정문에는 광화문(光化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이 있었다. 동서남북에는 네 개의 문을 만들어 좌청룡·우백호·전주작·후현무의 사신사(四神砂) 기능을 갖게 했다. 동문인 건춘문 천장에는 청룡 한 쌍을, 서문인 영추문 천장에는 호랑이 한 쌍을, 북문 신무문과 남문 광화문 천장에는 각각 거북과 주작 한 쌍을 그렸다. 1975년에 복원된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맞이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이 영추문은 신하들이 일하던 궐내각사 서쪽에 있어 궁에서 일하는 관료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영추문은 정도전과 세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왕자의 난’을 묵묵히 지켜봤다. 태조와 왕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방번에 이어 둘째로 태어난 방석은 방원을 경계했던 정도전과 그의 힘을 필요로 했던 태조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의안대군 방석은 이에 반발한 정안대군 방원의 비호세력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영추문 앞이었다.

  조선의 오랜 궁궐역사를 지켜봤던 영추문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는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고종 때 경복궁의 다른 문과 함께 중건됐고 1926년 4월27일 일제강점기 때 또 다시 무너져 아예 철거된다. 당시 매일신문은 영추문 바로 옆에 전차의 종점이 있어 전차의 운행진동이 원인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영추문은 1975년 다시 복원됐지만 당시 복원할 때 원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약 40m 아래로 옮겨 시멘트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도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문인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 경복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콘크리트 복원건물이기도 하다. 

 

*  영추문 천정의 백호 문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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