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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촌 탐방(12) - 선희궁터. 송강 정철 및 김상용(金尙容) 집터

by 혜강(惠江) 2014. 6. 23.

 

서촌 탐방(12)

 

선희궁터. 송강 정철 및 김상용(金尙容) 집터

 

·사진 남상학

 

 

 

 

 

    우당기념관에서 길 건너편 서울농학교와 바로 옆 서울맹학교 사이 담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그린 담장벽화들이 빼곡하다. 초등학생의 작품 같이 서툰 그림들이지만 장애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선희궁 터는 농아들의 배움터로 유난히 노거수(老巨樹)가 많은 이 학교 교정 뒤쪽에는 숨어있다. 이곳을 거쳐 송강 정철(松江 鄭澈) 집터 및 시비와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 및 김상용(金尙容) 집터를 차례로 탐방하였다.

 

선희궁 터

종로구 창의문로 12, 궁정동 1-1

 

 

  선희궁은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인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다. 원래 영빈 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쳤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新橋洞)에 해당하는 한성(漢城)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었다. 이후 1870년(고종 7)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으로 옮겼다.  현재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경우궁(景祐宮) 묘사(廟祀) 안에 합사되어 있다. 목조건물로, 내부 제단의 투각이 뛰어나며, 제단이 단색 옻칠로 되어 있어 칠궁의 다른 제단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단출한 것이 특징이다. 1975년 5월 12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집터 및 시비

 

청운초등학교 인근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서촌지역에 청운초교 인근에는 정치가이자 가사문학의 거봉인 송강 정철 집터와 김상용 집터(金尙容家址)가 있다.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정철(鄭澈,1536~1593년)은 1536년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지역인 조선 시대의 장의동(壯義洞)에서 태어났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사헌부 지평, 북관어사, 장악원정·직제학 승지를 거쳐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관동별곡(關東別曲)〉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그후 전라도관찰사,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 예조판서를 지냈고,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지었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바라보며, 
  下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페셧다.
  平평丘구驛역 말을 가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이하 생략>

     - <관동별곡> 서두

 


  <관동별곡>은 그가 1580년(선조 13) 1월 강원도관찰사로 제수되어 원주에 부임한 3월에 관동팔경과 내금강·외금강·해금강을 유람하고 이 작품을 지었다. 만폭동(萬瀑洞)·금강대(金剛臺) 등 내금강의 풍치, 외금강·해금강과 동해안의 풍광과 자신의 자신의 풍류를 노래했다. 이 작품은 대구법과 감탄사를 적절히 구사하고, 효과적인 생략법의 사용, 박력있고 화려한 문체로써 작가의 풍류와 애국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능란하고 화려하게 읊은 국토예찬으로 김만중이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한 것을 비롯, 후세에 두고두고 칭송되었다.

  또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정철이 50세 되던 1585년, 동인이 합세해 서인을 맹렬히 공격하는 바람에,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부득이 조정에서 물러나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한가하게 지내면서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때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연군의 정을 님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나타내 자신의 충정을 토로했다. 여성적인 정조나 어투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사용된 시어나 정경의 묘사가 탁월하다. 애절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간결한 문체로 국문시가의 가능성을 입증한 노래이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이다.

 

 



  특히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그의 연시조 <훈민가>(16수)는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던 1580년(선조 13) 정월부터 이듬해 3월 사이에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일명 ‘경민가(警民歌)’ 또는 ‘권민가(勸民歌)’라고도 한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길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후(後)l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平生)애 고텨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 정철, '훈민가(訓民歌) 중 일부 '

 



  유교적인 윤리관에 근거하여 바람직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유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작가 정철은 사대부계층의 선험적인 가치체계를 일방적으로 따르도록 명령하는 어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인간관계를 설정하고 정감어린 어휘들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제재들을 다룬 어떤 작품들보다도 강렬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정철은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서 우의정, 좌의정,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으나 후에는 파직되어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반대편 사람들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문집으로〈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 및 김상용(金尙容) 집터

 

인왕산 아래 종로구 청운동 계곡

 

 



   송강 정철의 집터를 지나 왼쪽으로 접어들면 조선 인조 때 재상이었던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풍경에 감탄해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을 새긴 바위가 있다. 


  인왕산 아래 종로구 청운동 일부 계곡은 예로부터 청풍계(淸風溪)로 불렸는데, 조선 시대 청풍계에는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김상용이 살던 집과 사당 등의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은 주택가로 변하였다.

  김상용(1561~1637)의 호는 선원(仙源) 혹은 풍계(楓溪)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선조 23(15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의정에 이르렀다. 인조 11(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는데,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이에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순절한 강화도에 순절비석이 세워지는 등 오래도록 충신으로서 추앙되었다. 1758년 영조의 특별명령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 추서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등에 여러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어버이 子息(자식)] 사이 하날 삼긴 至親(지친)이라
  부모 곳 아니면 이 몸이 이실소냐
  烏鳥(오조)도 反哺(반포)랄 하니 父母孝道(부모효도) 하여라.   

  夫婦(부부)라 하온거시 남으로 되어이셔
  如鼓瑟琴(여고슬금)하면 긔 아니 즐거오냐
  그러코 공경곳 아니면 卽同禽獸(즉동금수) 하리라.
                                                                    
    - 김상용의 <오륜가>의 일부


  위의 작품은 5수로 된 그의 시조 <오륜가>로, 앞의 것은 부자지륜(父子之倫)을, 뒤의 것은 부부지륜(夫婦之倫)을 읊은 것이다. '여고슬금"은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부부간의 화락함을 비유한 말이며, '즉동금수'는 짐승과 같다는 말이다.  

  김상용이 인왕산 기슭 청풍계에서 살았던 집은‘태고정’또는‘선원고택’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집터는 본래 학조대사가 집터를 정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 청풍계의 청풍대라는 이름의 바위에는 ‘백세청풍’이라는 글자가 각자가 보인다.‘백세청풍’은 고죽국(孤竹國: 은나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의 왕자 백이(伯夷)ㆍ숙제(叔弟)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말로서, 조선 시대에는‘백세청풍’을 충신들의 고택에 현판으로 걸거나, 혹은 거주지의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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