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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촌 탐방(14) - 창의문을 거쳐 겸재 정선의 집터, 육상궁을 둘러보다

by 혜강(惠江) 2014. 6. 25.

 서촌 탐방(14)

 

창의문을 거쳐 겸재 정선의 집터, 육상궁을 둘러보다

 


·사진 남상학

 

 

 

 

 

  창의문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오면서 먼저 경복고등학교 아래에 있는 겸재 정선 집터를 보고 이어 그 옆에 있는 육상궁을 찾았다. 

 

 

사소문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서울 종로구 청운동(창의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내려오면 바로 창의문이다.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로 일명 북문 또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은 4대문과 4소문 도합 8문이 있었다.  4대문 이름은 흥미롭게도 유교에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서남북 문에 적용했다.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대문만 별도로 숙청문으로 지었다. 그리고 4소문은 각각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불렀다.


  창의문은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도성 북서쪽에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 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하는 등 긴요한 때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창의문 성문 천장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닭을 형상화한 것으로 창의문 밖의 지세가 지네의 형상으로 풍수지리상 모반(반역)의 기운이 넘쳐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넣은 것이라고 한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멀리는 경기도 양주 등,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義軍)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揭板)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겸재 정선의 집터와 인곡정사(仁谷精舍)
 겸재 정선의 집터(종로구 청운동 89-9, 현 경복고등학교 일대)
인곡정사(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20)
 

  지금의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일대(종로구 청운동 89-9)는 조선 시대의 지명이 유란동 난곡이었는데 겸재 정선(1676~1759)이 태어나 이곳에서 52살까지 살았다.

  호가 겸재 또는 난곡이었던 정선은 14살 되던 생일에 아버지를 여의고 스승 김창흡이 낙향하자 그림의 길을 선택했다. 탁월한 그림 솜씨로 진경산수화의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경상도 하양 및 청하 현감을 거쳐 65살에 경기도 양천 현령, 79살에 사도시 청정, 81살에 종 2품인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겸재는 조선후기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왕산 주변의 명승지를 그린 ‘장동팔경첩’과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겨 화성으로 추앙을 받는다.

  정선은 이후 인왕산 아래,현재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된 지역에 인곡정사(仁谷精舍, 인왕유거, 현재의 옥인동 20)로 이사해서 84살로 죽을 때까지 그림의 완숙기를 살았다. 당시 이곳의 지명이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仁王谷)이었기 때문에 인곡정사라는 택호(宅號)를 썼던 모양이다. 그림 <인곡유거>에 정갈한 방에서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남겼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에서 군인아파트 앞마당에 자그마한 겸재 정선 쉼터를 만들었다.  

 

 

 

육상궁(毓祥宮, 구 칠궁)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2 / 종로구 궁정동 1-1


  육상궁은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사적 제149호이다.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淑嬪廟)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고쳤다. 육상궁 건물 등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숙빈 최씨는 현종 11년(1670) 11월 6일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출생,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출산하였다.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로 별세하자, 무덤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모시고 묘호(墓號)를 소령원(사적 제358호)이라 하였다.

   육상궁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육상궁을 비롯한 5채의 사당에 조선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궁으로 육상궁 건물에 숙빈 최씨와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인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궁(神宮)이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궁이다. 선희궁은 역시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신궁이고,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궁이며, 이들 두 신위는 한 건물에 모셔져 있다.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신위를 모신 신궁이다.

  육상궁 건물은 고종 19년(1882)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버린 것을 그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며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을 두고 나즈막한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ㆍ육상궁ㆍ덕안궁ㆍ경우궁ㆍ선희궁ㆍ대빈궁ㆍ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冷泉亭),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전통적인 한국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며 경복궁 권역이 축소되어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던 중 1968년 1월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34년간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오다가, 2001년 11월말부터 부분적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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