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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촌 탐방(11) - 송석원 터와 자수궁 터, 그리고 독립운동가 우당기념관(友堂記念館)

by 혜강(惠江) 2014. 6. 21.

 

서촌 탐방(11)

송석원 터와 자수궁 터,  그리고 독립운동가 우당기념관

·사진 남상학

 

 

 

 

송석원(松石園) 터

종로구 통인동 43-1(표석)

 



  표지석에는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이곳에 정조 때 평민시인 천수경(千壽慶, ? ~1818))이 시사를 지어 송석원이라 이름을 붙였고, 1914년 순정황후 윤씨의 백부 윤덕영도 역시 이곳에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석원은 옥계시사의 맹주인 서당 훈장 천수경의 집이다. 당대 한양의 문화 중심으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 터, 송석원 자리는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다. 지금은 주택가와 상가가 드문드문 모여 있는 곳이지만 과거 이곳은 인왕산계곡 깊숙한 곳이어서 조선 시대에는 꽤나 소문난 경승지였던 모양이다.

  당시 문인들은 송석원에 모여 옥계시사라는 시를 짓는 동호인 모임을 만들었다. 옥계라는 이름은 옥인동을 흐르던 옥류동천 계곡에서 나왔다. 옥계시사는 정조 10년인 1786년 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결성돼 30여년 간 이어졌고, ‘송석원시사’로도 불리는 옥계시사는 조선 시대 웃대 중인 문화의 정점이다.  송석원이란 글씨는 추사의 것으로 이곳의 한 단독주택 마당 석축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이 가능해 보이지만, 재개발로 아파트를 지으면서 영영 묻히고 말았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전봇대 기둥에 그려진 청아한 소나무 한 그루 벽화로 옛 영화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절친한 사이로 ​1791년 유둣날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모임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인문의 그림 '송석원 시사아회도'(위)와 김홍도의 '송석원 시사야연도'(아래)

 

 

자수궁(慈壽宮) 터

필운대로 옥인아파트 지역

 

  

송석원 터를 지나 위쪽 길로 따라가다 보면 조선 광해군 때 지은 궁궐 자수궁(慈壽宮) 터가 있다. 자수궁은 인왕산 아래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거처하며 불교에 귀의해 여생을 보내게 하였던 곳이다.

  자수궁은 조선조 광해군 때에 세운 궁궐로 무안군의 옛집을 수리하여 자수궁(慈壽宮)이라 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북학이라는 학당이 이곳에 서 있었으나 광해군 8년(1616) 경희궁 일대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풍수설이 나돌아 광해군이 이 기운을 차단할 목적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자수궁은 1623년(인조 1) 헐렸으며 자수궁 자리에 후궁들이 노후에 니승(尼僧)이 되어 사는 자수원으로 개명된 비구니원을 두었다. 자수원(慈壽院)은 한때 5,000여 명의 여승(女僧)을 수용하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원이 되었는데, 그 후 폐단이 심하여 1661년 부제학 유계(兪棨) 등의 상계로 폐지되었다.



 

 

독립운동가 우당기념관(友堂記念館)

 

 

 

  서울농학교, 서울맹학교 맞은편의 우당기념관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년~1932년) 선생과 형제들(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및 애국지사들을 기념하는 곳으로 2001년 6월 신축, 개관하였다.  우당과 형제들은 전 재산을 처분해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든 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회영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

  기념관의 전시물은 6개 코너로 이루어졌다. 전시물은 이회영의 흉상과 사진, 연보를 비롯하여 우당 6형제가 망명 직전 결의를 다지는 장면, 신흥무관학교 및 북경시대의 애국지사, 신민회 및 경학사에 참여한 주요 애국지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김성수, 오면직의 자료, 헤이그밀사사건 신임장, 망명 후 독립기지 선정을 위해 토론하고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 6형제의 그림, 우당선생 가족이 받은 건국 훈장 등이 잘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관련 서적을 진열한 도서가, 회의실 등이 갖춰져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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