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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촌 탐방(13) -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by 혜강(惠江) 2014. 6. 24.

 

서촌 탐방(13)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청운동 3-65

 

 

 

·사진 남상학

 

 

 

 

 

 

  서촌 탐사의 대미는 청운동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언덕(일명 청암공원)에 올라 그의 시를 음미하면서 마을 전체 풍경을 조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공원에는 윤동주의 대표 작품인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모두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또 ‘서시정’이라는 이름의 정자,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라는 설치작품 등이 공원에 들어서 있다. 언덕 정상에서 동쪽으로 눈길을 주면 창의문과 백악산이, 서쪽을 보면 서시정과 인왕산이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에 있는 소설가 김 송(金松, 1909~1988)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이때 시인은 하숙집에서 가까운 인왕산 자락 청운공원 주변을 거닐며 대표작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쉽게 쓰여진 시' 등의 시상을 가다듬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기념하여 공원에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과 기념비, 기념물이 있는 공원이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위에는 윤동주의 대표 작품인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모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전문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된 서시(序詩)는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과 윤동주의 생애를 암시하고 상징한다.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성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우로부터 유화웅, 최복현, 본인(남상학)

 

 

 

윤동주문학관

 

 

   이 언덕 아래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전시실로 구성된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다. 종로구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청운공원 일대 인왕산 자락에 버려진 90㎡ 정도의 용도 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재탄생시킨 도시 재생 성공사례 건축물이다.  윤동주문학관은 도시 재생 성공사례 건축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윤동주문학관은 작지만 큰 문학 쉼터이다. '시안채'라 이름을 붙인 제1전시실은 시인의 순결한 시심(詩心)을 상징하는 순백의 공간으로 '인간 윤동주를 느낄 수 있다. 9개의 전시대에는 시인의 일생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 자료들과 함께 친필 원고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윤동주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 부분을 개방하여 중정(中廷)을 만들었고 '열린 우물'이라 명명했다. 물탱크에 저장되었던 물의 흔적이 벽채에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도록 해준다.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어 생활한 것을 상징하는 제2전시실, 시멘트벽은 감옥을 상징하는 것이며, 푸르게 자란 풀을 그의 살아있는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지화상'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들어있는 시중에서 윤동주가 가장 먼저 쓴 작품이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치열한 자기응시와 자기탐색의 보고서였다. 그는 '자화상'을 쓰기 1년전 무렵인 1938년 9~10월경에 5편의 시를 쓰고는 그 이후 1년 동안 단 한편의 작품도 쓰지 않았다.  즉 '자화상'은 전후 1년간의 공백을 두고 시인의 갈등과 번민에서 태어난 시이다. 그 공백 기간 동안 윤동주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부단하게 자의식과의 싸움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윤동주의 자기성찰의 깊이와 무게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또 하나의 용도 폐기된 물탱크를 원형그대로 보존하여 만든 '닫힌 우물'이란 이름을 붙인 제3전시실은 침묵하는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조성해 놓았다. 어쩌면 외부의 빛을 차단한 캄캄한 물탱크는 윤동 시인이 갇혔던 후쿠오카 형무소의 감옥처럼 보였고, 높은 벽채의 꼭대기에 뚫어놓은 구멍은 단 하나 외부로 통하는 통로로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윤동주 시인이 영어(囹圄)의 몸으로 그토록 기다렸던 조국광복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곳에선 시인의 일생과 시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백의 미가 살아 있는 공간 구성과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전시로 민족시인의 삶과 문학이 잘 녹아 있었다. 역발상의 이소진 건축가는 도시의 흉물이었던 폐허의 부활을 통해 '남의 나라에 살아야 했던 시인의 슬픈 천명을 노래했던 모국어'를 담백한 현대건축 언어로 담아 문학을 사랑하는 방문객에게 공감과 위안을 주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히라누마(平沼)' 창씨개명하고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 '참회록(懺悔錄)'을 썼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의 부끄러운 삶을 노래한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참회록> 전문



  참회록이란 지난 자신의 삶에 대한 잘못을 반성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시에서 그는 거울을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 모습은 오욕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에 이르러 욕되다고 한다. 그러면서 두 개의 ‘참회록’을 쓴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24년 동안의 삶에 대한 참회록으로서, 아무런 기쁨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다.

   두 번째는 미래의 ‘어느 즐거운 날’(아마도 그날은 조국이 광복에 이른 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쓸 참회록으로, 식민지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서 기쁨 없는 삶만을 호소하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글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지나온 암울한 역사 속에서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성실한 자기 성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울하고 비극인 자기 인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슬픈 사람의 뒷모양’에서 우리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릿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10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하였으나 식민지 청년 윤동주는 결국,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1944년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생체실험의 일환으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죽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문학관에는 방문객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카페 '별뜨락'을 운영한다. 언덕 위 카페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벤치에 앉아 북한산과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별 헤는 밤

                 - 윤 동 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5

 

 

 

;▲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은 아름다운 이상에의 동경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민족에 대한 비애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윤동주문학관을 내려오며 나는 그의 '별 헤는밤'을 읊조려 본다.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그의 맑은 영혼으로 혼탁해진 나의 마음을 씻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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