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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탐방(6) - '세종대왕 탄생지'의 의미를 살려 '세종마을'로 명명

by 혜강(惠江) 2014. 6. 17.

 

서촌 탐방(6)


            '세종대왕 탄생지'의 의미를 살려 '세종마을'로 명명

·사진 남상학

 



* 자하문로 길가에 세운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서울 종로구 통인동 137) *

 

 

  서울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직진하여 통인시장 가까운 대로변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일대는 세종대왕의 생가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 그래서 이곳이 '세종마을'이라 불리는 이유다.

  세종대왕은 1397년 지금의 통인동 119에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표지석에는 “세종대왕 나신곳 -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왕이 된 세종은 사서 편찬, 집현전의 연구 기능을 확대하여 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았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하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뒷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愛民精神)에서 비롯되었다. 

  백성에 대한 세종대왕의 사랑은 훈민정음 서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 새로운 글자를 만들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 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그 뜻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그 뜻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다. 따라서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자기의 뜻을 글로 써서 나타내지 못하는 이가 많으니라.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이 이것을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창제에 매달리던 세종대왕은 오랫동안 눈병으로 고생을 했다. 백성들에게 쉽고 편리한 문자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보고 연구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종대왕을 도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여러 집현전 학자들의 공도 빼놓을 수 없지만. 오랜 연구 끝에 1443년 12월(음력), 28자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이 탄생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훈민정음을 세상을 알리기 위해 만든 책이 《훈민정음해례본》다. 오늘날 한글날인 10월 9일은 당시 음력 9월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지정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세계가 인정한 최고의 문자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고,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언어학회와 언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훈민정음(한글)의 편리성과 과학성을 최고라고 인정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 소설가 펄 벅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단순한 글자이며,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음성 언어도 표기할 수 있다.”라고 했다. 영국의 언어학자인 제프리 샘슨은 “한글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다.”라고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언어학자와 역사학자, 작가들이 한글을 최고의 문자로 인정했다.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 · 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풍류를 아는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1442년 집을 짓고 살던 계곡이다. 아버지 세종이 집에 ‘비해당’이란 당호를 지어줬다. 한 살 많은 친형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뒤, 안평대군은 세조가 내린 독배를 받고 서른여섯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차들이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길가에 덩그렇게 표지석 하나 서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씁쓸한 생각이 솟았다. 5천 년 역사에 길이 빛날 성군의 탄생지가 초라한 표지석 하나만 서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마을 이름을 서촌을‘세종마을’바꿀 바에는 이 지역에 생가를 복원하든지 아니면 세종대왕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도 제대로 갖춰야 하지 않을까? 역대 대통령의 출생지도 모두 복원하는 마당에 이런 푸대접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 광화문에 세운 세종대왕 좌상

 

* 세종대왕의 업적을 알려주는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광화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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