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인릉
조선 3대 태종과 23대 순조의 왕릉을 찾아가다
글·사진 남상학
서울 강남에 살면서도 헌인릉 탐방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헌인릉은 강남의 대모산 뒤쪽인 내곡동에 위치한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전에는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호)은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을 합쳐 연대순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것은 인릉이고, 울창한 숲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헌릉이다.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우거진 숲이 일품이며, 헌릉에는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습지가 있다.
원래 왕릉 뒤에는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고, 특히 봉분 뒤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가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릉의 지대가 낮은 홍살문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오리나무는 장수목으로 옛날에 5리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태종 때는 유달리 천재지변이 많았다. 태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 지진이 일어났고, 홍수에 마소가 떠내려갔고, 태종이 만년에 애용한 정자 기둥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한 태종은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태종우'라고 하는 이 비는 헌릉의 혼유석 밑 하전석의 네모난 구멍 속에 고였다고 한다.
학자들이 헌인릉에 주목하는 이유는 400년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조성된 두 개의 왕릉에서 조선 초기와 후기 양식을 비교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헌인릉 입구와 헌인릉 표지석,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석판
인릉(人陵) :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묘
입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릉을 먼저 탐방하고 나서 오리나무가 무성한 숲길로 이동하여 헌릉을 탐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인릉부터 탐방하고 정리하였다.
잔디로 산뜻하게 정리된 묘역은 진초록 빛으로 반겼다. 왼쪽 계단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올랐다. 서울 지역에 내린 계속된 폭우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쌍릉의 두 봉분은 덮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을 두른 쌍릉에서 나는 세월과 역사적인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묘역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그리고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그 중간 부분이 6·25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서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홍살문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언덕 아래에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이 있다.
* 인릉의 정자각과 제향 때의 제수진설도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무덤으로서 무덤 아래에 병풍석은 없이 12간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로 양석과 마석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에워쌌다. 수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봉분에 보호막을 설치했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과 마석 1쌍, 명등석 1좌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인릉
11세의 나이로 즉위한 23대 순조는 즉위와 함께 영조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었고,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장인인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해(재위 8년) 후부터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정치질서를 개편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거기에다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더욱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34년의 긴 세월을 왕위에 있었으나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 헌릉의 상설도, 정자각, 그리고 제수진열도
* 인릉의 비각 안에 세운 비석
헌릉(獻陵) :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묘
인릉을 둘러보고 나서 헌릉으로 향한다. 헌릉 역시 능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나있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무덤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무덤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 상석 2좌,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감싸 안으며 무덤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중간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 마석 2쌍, 팔각형 명등석 2좌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 마석 각 4좌가 아래층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 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세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다.
* 헌릉의 쌍릉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쌍릉으로 안장한 헌릉
* 헌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양석, 호석, 마석들
아마도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은 부친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난간석을 만들만큼 부모님의 화해를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 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승하하여 18년간 이곳 헌릉의 서쪽 편에 모셔졌던 것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이 간다.
세종 묘는 이곳에 있다가 예종 원년 1469년)에 지금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모셨다. 헌릉에는 쌍봉으로 있는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헌릉의 홍살문, 정자각. 상설도
우리가 왕릉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가 어떻게 생을 살아왔는가, 아울러 역사에 남긴 공과는 무엇인가?” 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그가 왕권을 잡기 위해 저지른 일을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와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조선건국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그가 남긴 시로써 잠시 살펴보면, 이방원은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생각으로 정몽주를 자택으로 불러들여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가 바로『청구영언』과『가곡원류』,『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何如歌)》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丹心歌)》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또 그는 조선건국 이후, 건국에 기여한 전비 한씨 소생 자녀들은 외면하고 신덕왕후 소생 아들 중 세자를 정한 부왕과 정도전의 처사에 반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또 자신의 처남과 사돈 등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피 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으로 왕권을 다진 것이다. 그는 즉위 후에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주자소 설치와 서적을 간행하는 등 정치개혁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헌릉의 비각과 신도비
헌릉과 인릉 사이 언덕 아래쪽에는 오리나무 숲이다. 서울시에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는 헌인릉 오리나무 숲은 대모산 주변 1만7133평으로 지하수가 풍부하고 토심이 깊어 서울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오리나무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태종이 살아생전에 가뭄이 심하여 ‘죽어서라도 비를 내리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헌릉에는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습지가 있다.
또 곳곳에 물웅덩이와 소규모 수로가 있어 물봉선, 삿갓사초, 애기나리, 둥굴레, 붓꽃 등 다양한 습지성 식물이 자라고 서울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 제비, 꾀꼬리, 박새 등도 출현한다고 한다.
*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는 헌인릉은 오리나무 숲과 희귀 식물들이 가득하다.
이곳의 두 왕릉은 400년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조성된 것이라 조선 초기와 후기의 왕릉 양식을 한 곳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왕릉지킴이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돌아볼 수 있어 역사기행을 겸한 나들이 코스로 인기다.
음력설에는 전통 민속놀이마당이 열리며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 해마다 제례를 올리는데 이때 일반인의 관람도 허용된다. 운영시간은 하절기 09:00~18:30, 동절기 09:00~17:30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전화 02-445-034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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