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산행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 우리는 행복했다.
- 2012. 5. 10(목) / 오봉회 회원 5명 -
글·사진 남상학
* 백운대 아래쪽에서 찍은 인수봉의 모습 *
오봉회 회원들(강상대, 김삼봉, 남상학, 오용환, 우남일)이 북한산 12성문을 세 번에 나누어 종주하기로 하고, 그 첫날 우리 일행은 2012년 5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만났다. 여기서 송추로 가는 버스를 타고 고양시 효자동에서 내렸다.
우리 산행의 안내자격인 오(吳) 선생은 이곳에서 시구문(서암문)으로 올라가 서암문을 시발점으로 하여 북문에 이르는 원효봉 능선을 거쳐 위문~용암문을 지나 용암문에서 시작되는 산성주능선의 일부를 아우르는 코스를 하루 여정으로 잡은 듯했다. 여러 모로 보아 우리 형편으로는 무리한 일정이지만 기왕 북한산성 12성문을 종주하려면 능선에 올라선 김에 걸을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걸어보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처음에는 현명한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산성 안의 성문은 모두 14개, 원효능선상에 시구문(서암문), 북문 등 2개의 성문이 있고 주능선상에는 위문(백운봉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등 6개의 성문이 있으며, 의상능선 상에는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또한 계곡에 중성문과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코스를 약간 복잡하게 잡으면 14성문종주도 가능하지만 능선상의 12성문만을 산행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능선을 따라가는 산행이지만 원효봉 능선상의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까지의 구간과 위문에서 용암문까지의 만경대, 용암봉구간이 위험하여 실제 산행은 우회구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위문에서 막바로 주능선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정상인 백운대는 선택코스가 된다.
12성문을 종주하는 방법은 두 가지. 어느 문을 기점으로 시작하는지 여부이다. 첫 번째는 의상봉능선, 산성주능선을 거쳐 원효봉능선으로 산행하는 방법과 반대로 원효봉능선을 먼저 시작해 의상봉능선으로 끝을 맺는 방법이 있다. 이 두 가지 방법 중 의상봉능선을 먼저 오르는 길이 조금 더 힘들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린 곳은 박태성정려비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시구문(서암문)을 산행기점으로 삼기에는 이미 북쪽으로 멀리 지나친 곳이어서 원효봉능선의 끝 지점인 북문으로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코스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고 애초의 계획을 수정했다.
효자비가 있는 효자동은 전국에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가 많지만, 이곳 고양시의 효자동은 조선 후기에 한양에 살던 ‘박태성(朴泰星)’이라는 실제 인물 때문에 생겼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의 부친묘를 찾기 위해 한양에서 무악재와 박석고개를 거쳐 오갔고, 그의 사후에 나라에서 세운 정려비(旌閭碑)가 지금도 대로변에 보존돼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오석의 비에는 ‘조선효자 박공태성 정려지비(朝鮮孝子 朴公泰星 旌閭之碑)’라 표기되어 있다. 대좌까지 갖추어진 이 비는 조선시대 후기 효자로 널리 알려진 박태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고종 30년(1893)에 세워졌다.
여기가 오늘 우리가 오르려는 북한산 등산의 시발점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산성 주능선, 우이능선, 비봉능선, 형제능선, 의상능선, 진달래능선 등 수많은 능선과 계곡이 펼쳐져 있어 1년 내내 오르내려도 늘 새로운 곳이다. 아담한 오솔길부터 실개천이 흐르는 호젓한 등산로, 초보자는 쉽사리 발을 떼놓기 힘든 험한 암벽 코스까지 다양한 산행 코스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박태성정려비를 우측에 두고 작은 다리를 건너면 「등산로→」라는 안내판을 만난다. 여기서 우측으로 약20m 가면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한참 걷다 보니 북한산둘레길 효자동구간 팻말이 북문 방향표시가 보였다.
그대로 오르면 북문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북문으로 가는 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백운대와 원효봉을 가리키는 팻말이 보여 백운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북한산 등산에 미숙했던 우리로서는 여기서부터 코스를 빗나갔던 것이다. 북문은 원효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북문으로 가는 길을 놓치고 백운대 방향으로 걸었다. 30분 정도 올라 “긴급연락처 119 현위치 8-7(밤골)” 표지판을 보고서야 이곳이 ‘밤골계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미한 길 자취를 따라 무조건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완만하면서 뚜렷하던 길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거칠어지고 가팔라진다. 중간에 길을 찾기 힘들었지만 계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다.
암반이 깔린 계곡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능선이라면 간간이 확 트인 전망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바위로 덮인 계곡을 오르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계곡을 내려오는 등산객들에게 “얼마를 더 올라가야 능선을 만나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동행한 우(禹) 선생의 등산화가 말썽을 일으켰다. 오래 묵혀두었다가 신고 온 등산화 바닥이 오랜 세월의 풍상 속에 부식되어 몸체와 바닥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변에서 나일론 끈을 주워 동여매는 수밖에 없었다.
산행들머리로부터 몇 차례 쉬면서 오르기 무려 3시간, 비로소 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우람한 바위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암봉을 발견한 우리는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이 번적 뜨였고, 곧 능선에 오를 수 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드니 V자 높은 암반 사이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까마득하게 보이고 그 위는 전망대인 듯했다. 전망대라면 정상은 아니더라도 발아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능선쯤 되라는 생각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좌우양쪽의 수려한 산세는 지친 심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암반에 뿌리박고 성장한 소나무의 생명력을 보는 순간 계곡을 오르며 힘들다고 푸념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전망대에서 숨을 고르고 V자 암반 사이를 간신히 빠져 나오니 암벽을 타는 분들이 보였다. 줄 하나에 몸을 매달고 암반 위로 오르는 저들의 모험심이 놀랍고 대견했다.
이들을 뒤로 하고 내려와 백운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잠시 주변을 살펴보니 뒤로 인수봉이 보이고 바로 위로는 백운대로 이어지는 암봉이 높이 솟아 있다. 인수봉에서도 암벽을 타는 모습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우리는 암반에 앉아 아슬아슬하게 암벽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백운대(836m)는 인수봉(810m), 만경대(799m)의 세 봉우리가 모여 이루어진 북한산(일명:삼각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해당한다. 북한산 지역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정점으로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으로는 상장봉, 남으로는 보현봉에 이르며 다시 사방으로 굵직한 지능선을 뻗쳐 웅장한 산세를 이룬다. 특히 북한산 국립공원 전체의 중심에 높이 솟아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와 노적봉 일대의 암봉군은 북한산 경관의 으뜸으로 꼽힌다.
백운대 정상을 오르는 길은 초입에는 나무계단이지만 곧 거대한 암반에 가설한 쇠줄을 잡고 오르는 스릴 넘치는 길이다. 정상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나를 포함하여 두 사람은 백운대를 오르는 지점 아래 위문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오 박사와 강 박사는 “여기까지 와서 백운대 정상을 밟지 않고 갈 수 있는냐.”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백운대에서 내려온 오선생은 무척 힘들어 했다. 옆에서 보기에도 힘이 쭉 빠져 있고,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혹 심장에 무리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동료가 휴대하고 다니는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주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심장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심장을 뛰게 하는 상비약이었기 때문이다.
진정이 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 자신이 진단하기로는 역류성 식도염 증세 때문일 거라고 했다. 안내자로서 안내를 바로 하지 못해 일행을 고생시킨 책임감과 가파른 경사를 숨 가쁘게 올라온 탓에 일시적으로 생긴 현상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갑작스런 환자와 말썽을 일으킨 등산화를 생각하여 걷는 속도를 늦춰가며 걸었다.
백운대 정상에서 내려와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위문(백운동 암문)이다. 북한산 위문(백운동 암문)은 해발 740m에 위치해 있고 북한산성 중에 가장 높은 문이다. 이 성곽과 암문은 성곽길을 걷고자 했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코스에 대한 협의를 했다. 대동문까지 가서 진달래 능선을 타고 백련사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암문을 빠져나와 대동문 방향으로 가기 위해 꽤 긴 나무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의 끝 지점에 세운 안내표지대에는 대동문까지 2.6㎞라고 쓰여 있다. 대동문까지 가서 진달래 능선으로 하산하려면 앞으로 3시간은 족히 걸릴 심산이다. 무리한 산행인데 내 몸이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힘든 산행이면서도 뒤로 백운대와 또 노적봉과 만경대를 좌우에 두고 걷자니 기분은 날아가는 느낌이다. 만경봉은 백운대 인수봉보다는 조금 낮지만 암봉이 참으로 우람하다. 서울처럼 도심 가까운 곳에 이런 명산, 이런 수려한 암봉들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이런 자연경관을 아끼고 사랑하며 잘 가꿔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다짐하게 된다. 잠시 전망대에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다시 쇠줄을 잡고 암반을 오르내리는 길을 가야했다.
드디어 용암문, 대동문까지는 아직도 1.5㎞ 남았단다. 성곽을 우측으로 끼고 가는 길은 듬성듬성 잡목이 있지만 소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길이다. 용암문을 지나면 길은 평탄해져 대동문까지 이어진다. 용암문에서 200m만 가면 북한산대피소. 통나무집과 주위에 평탄한 장소가 많아 쉬어가기 좋으며 능산상에서 유일하게 샘터가 있는 곳이다.
길을 걸으며 잠시 고개를 들고 왼쪽 언덕 위를 바라보니 높다랗게 고풍스런 정자 하나가 서 있다. 자세히 보니 동장대(東將臺)였다. 위문에서 대남문에 이르는 중간쯤 거리의 가장 우뚝 솟은 언덕 위였다. 장대란 전투시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축조된 장군의 지휘소다. 동장대는 북장대, 남장대 등 북한산의 3대 장대 증 가장 규모가 크며 유일하게 복원된 장대다. 동장대에서 대동문 까지도 편하다. 동장대를 지나서도 성곽을 따라 계속 걸어 드디어 대동문에 이르렀다. 대동문 앞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우리는 대남문으로 직진하는 길을 버리고 대동문에서 빠져나와 하산하기로 했다. 성곽길은 위문~용암문~ 동장대~ 대동문에 이르는 불과 3㎞를 걷고 하산하는 셈이다. 대동문을 지나 진달래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인수봉. 산정상인 백운대, 만경대가 선명하다.
진달래 능선은 이제 철이 막 지나 진달래꽃은 볼 수 없으나 이름 그대로 진달래 나무가 많았다. 좀 일찍 왔더라면 꽃이 고운 진달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을 터인데 좀 아쉬웠다. 대동문에서 거의 3㎞정도 내려오면 삼각산체육회의 체육장이 있고, 이어 길가에 백련약수가 우릴 맞는다. 이어 애국지사 묘역을 지나면 백련공원지킴터다. 공원지킴터를 지나 대동천2교를 지나면 큰길이다.
비록 오늘 산행은 코스를 벗어남으로써 성곽의 북문으로 오르지 못했지만 오히려 난이도 최상의 밤골계곡을 오를 수 있었고, 60, 70대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6시간 30분간의 산행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적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날 산행에서 잊을 수 없었던 일은 오르막 산행에부터 불거진 등산화 사건과 갑작스런 신체적 이상으로 걱정했던 일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료를 배려하고 협동하는 마음으로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될 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당골시골집>(서울 강북구 수유2동 269-19, 02-900-7797)에서의 뒤풀이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 깊은 시간이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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