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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북한산둘레길(10~12) : 내시묘역-효자길-충의길

by 혜강(惠江) 2011. 12. 21.

 

북한산둘레길(10~12구간)

내시묘역-효자길-충의길

군왕에 대한 절대신뢰와 충효(忠孝)를 되새기며 걷는 길

 

 

·사진 남상학

 

 

 

 

  북한산둘레길 걷기 넷째날이다. 오늘은 내시묘역길 3.5㎞와 효자길 3.3㎞를 걷게 된다. 좀 더 걸을 수 있지만 갑자기 추위가 닥쳐서 무리하지 않고 여유롭게 진행하기로 했다. 두 구간을 합하면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3시간 15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여전히 회원 모두 상쾌한 마음으로 걸었다.

 

♣ 제10구간 (내시묘역길) : 안타까운 여인과 거세당한 남정네의 한(恨)이 서린 길   (3.5㎞, 1시간 40분 소요)

 

 

   10구간은 방패교육대 앞-여기소 터-백화사 입구-송금물침비-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산성분소- 효자동 공설묘지-둘레교까지 연결된다.  10구간을 걷기 위해서는 지하철 구파발역 1번 출구로 나와 버스(704, 34)를 타고 입곡삼거리에 하차하여 방패교육대 입구까지 걷는다.(도보 5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10구간은 내시묘역길로 명명되어 있다. 둘레길 안내표지대를 따라 걷는 길의 입구부터 얼마간은 소나무, 향나무, 잣나무, 전나무들의 묘목이 자라는 지역이다. 상큼한 향내가 콧속을 상쾌하게 만든다.

  숲 사이로 난 호젓한 숲길을 걷다 개천을 건너면 바로 여기소마을 경로당 앞에 다다른다. 경로당 앞에는 표지석이 있는데, 바로 이 경로당 자리에 ‘여기소(汝其沼)’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 한 기생이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대공사에 부정탄다 하여 수문지기가 여인을 막아섰다. 공사가 다 끝나고 다른 일꾼들이 다 내려올 동안 관리는 내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기생은 험한 성을 쌓다가 정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못에 몸을 던졌다. 관리는 마지막까지 산성 마무리를 하느라 뒤늦게 내려와 기생의 이야기를 듣고 통곡을 했다. 

 

 “그대 여기서 죽었는가?” “너 여(汝), 거기 기(其). 못 소(沼)에서 죽었다는 말인가?”  

 

  이 관리의 통곡에서 기생이 빠져 죽은 못을 ‘여기소(汝其沼)’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못은 사라지고 터와 지명만이 전설과 함께 전하고 있다. 그 관리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가는 길에 죽었다고 한다.

  여기소 터에서부터 시골 마을길을 걷는 느낌이다.  마을길은 포장을 위해 정비 중이고, 개천을 사이에 두고 신축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서울에 이런 지역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택지로서는 1급지라고나 할까? 뾰족하게 솟은 의상봉을 마주하여 앞으로 나가다보면 백화사 앞이다.

   내시묘역은 백화사 안쪽으로 사유지를 넘어 지나가야 하기에 둘레길이 내시묘역 (內侍墓域)안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내시묘역이라지만 내시묘역은 둘레길을 걸으며 찾아보기 어렵다.  군신의 예를 목숨처럼 여기며 왕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던 이들, 이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자인 왕의 최측근으로 궁중 내의 많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정사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또 이들은 궁중 내 살림을 맡아 왕실의 재산관리, 각종 공사 등을 맡아서 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그 역할이 많이 닮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내시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부정적인 측면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음흉한 눈초리와 가냘픈 목소리, 그리고 쪼그라진 어깨에 종종걸음을 치면서 대신들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고정 관념처럼 되어 있다. 그 동안 역사는 어쩌면 그들을 비하하고, 분란을 일으킨 행적만을 부각시켰다.

  북한산둘레길의 안내서는 내시묘역길을 가리켜 “군거불의 독립불구(群居不倚 獨立不懼)”라는 글을 붙였다. “무리 지어 있어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서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뜻의 이 글귀는 소식(蘇軾)이 대나무 그림으로 집을 꾸민 친구에게 써준 <묵군당기墨君堂記)>에 처음 보이는 말이다. 대나무가 가진 대쪽같은 충절, 지조를 임금에 대한 내시의 충절, 지조와 연관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에도 궁중의 사람으로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수많은 내시들이 있었다.       
  
   특별한 신분인 내시는 선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양민 지원자 중에서 선발하되 내시가 되기 위해선 이들은 생식기를 거세해야 했다. 남근과 고환뿌리까지 말이다. 그것은 궁궐 내의 여인들을 넘보지 않고 오직 군주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한 평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내시 지망생 중 80%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는 사람만이 내시로서 자격을 부여받았다. 

 

   문서나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내시들은 결혼을 하거나 양자를 두어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족보도 만들었다고 한다. 내시들에게도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바로 이곳 백화사 뒤쪽 일대가 최대규모의 내시묘역이었다.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진 무덤이 되어 훼손되거나 아예 그 자취마저 없어진 것이 많다고 한다. 후손들조차 내시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이었을까?  내시묘역길을 걸으며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내시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그들의 역할과 삶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삼았다.

  백화사 입구에서 좌측의 숲길로 들어서서 언덕을 오르면 경천군송금물침비까지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바뀐다. 경천군(慶川君)은 이해룡이 임진왜란 때 역관으로 일본과의 화평교섭에 관여하여 1602년 하사받은 칭호로서 이 ‘송금물침비’는 글자그대로  “경천군에게 하사한 경계 내의 소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의 비석이다.

  비석 앞 벤치에서 잠사 쉬었다가 야트막한 오르막 길을 오르면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북한산초등학교가 보이고 좌측으로 돌아 북한산성 기점 상가지구에 닿는다. 이곳 북한산성 기점은 우이동 기점과 더불어 북한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라 상가지구에는 등산복을 파는 상점과 식당이 많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전주이씨 해안군파 서흥군 묘소 입구를 지나고, 북한산 계곡을 가로지르는 높이 8m의 투명발판 설치되어 아찔함을 느끼게 하는 '둘레교'도 만날 수 있다. 다리 중간에는 바닥이 유리인 부분이 있어 계곡 아래를 볼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걷기 좋은 솔숲길이 펼쳐진다. 길을 걷다보면 좌측에 이름도 멋스러운 간이매점 ‘둘레길미소쉼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커피와 차 음료, 생수, 컵라면 외에도 어묵과 묵, 녹두빈대떡 등도 팔고 있어 간이 테이블에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우측 멀리 원효봉의 모습을 감상하며 효자농원 사이로 난 공원 속 같은 길을 따르다 원효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만나면 좌측으로 꺾는다. 효자동 공설묘지 방향으로 걷다 차도에 닿으면 안내판이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이 끝났음을 알린다. 

 

 

 


♣ 11구간(효자길) : 걸음마다 효심(孝心)을 새기며 걷는 숲길(3.3㎞, 약 1시간 30분)

 

 

 

  효자동 공설묘지에서 사기막골 입구까지 이어지는 11구간은 효자길로 명명되어 있다. 북한산 인수봉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흐르는 창릉천이 에두른 효자길은 효자 박태성과 인왕산 호랑이에 대한 전설이 서린 길이다.

  이 길의 시작은 숲속 길이 아니라 구파발에서 북한산성 입구를 지나 송추, 의정부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순영산장, 관세농원을 지나 걷다보면 밤골로 향하는 산길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기 좋은 산길이다. 나무 한 그루도 소중하게 여기며 조심조심 놓은 목재데크와 다리, 능선과 오솔길로 구성되어 있다. 데크를 설치하면서 나무를 베지 않고 데크 중간으로 뻗어오르게 한  ‘Y자’ 나무도 볼거리이며, 활엽수 낙엽이 깔린 길가에는 헤르만 헤세의 ‘낙엽’이란 시팻말이 있다. 팻말 앞에 잠시 멈춰시를 읽어본다.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 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변화하고 없어지는 것 외에는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름까지도
가을이 되어 조락(凋落)을 느끼려고 합니다 
나뭇잎이여, 낙엽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일, 한 때 화려한 성장(盛粧)을 뽑내던 자태도 시간이 지나면 조락하는 것이 이치인 것을! 세상만물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안타까움도 슬픔도 미움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면 곧 효자비 '박태성정려비'를 만나게 된다. 효자비의 높이는 117㎝, 폭41.5㎝, 두께12㎝이고, 효자비에는 ‘朝鮮孝子朴公泰星旌閭之碑’라 쓰여 있다. 박태성 묘의 좌우에는 배(配) 의인(宜人) 완산이씨(完山李氏)와 계배(繼配) 의인(宜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묘(墓)가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1기, 망주석 2기, 소동자상 2구의 석물이 있다. 효성 지극한 박태성과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박태성을 따랐던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는 이렇다.  

 

  “옛 한양에 본관이 밀양인 박태성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매일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렸을 적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찾아 고양 땅 북한산 기슭을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 묘를 찾아가려면 무악재 박석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곳은 인왕산 자락 험한 산길로 호랑이가 종종 나타난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하지만 박태성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를 오갔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발걸음을 재촉하다 고개에서 호랑이 한 마리와 마주쳤다. 너무 놀란 그는 잠시 뒷걸음을 쳤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호랑이를 마주 대하니 호랑이는 자기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호랑이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박태성은 호랑이 등에 올라탔고, 호랑이는 정신없이 달려 아버지의 묘에 그를 데려다 주었다. 그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린 뒤에도 호랑이는 기다렸다가 무악재 고개까지 태워줬다. 그 날 이후 매일 무악재 고개에는 호랑이가 효자 박태성을 기다렸고, 호랑이가 아버지 묘까지 데려가고 데려오기를 무려 40여 년간 계속했다.

  나이를 먹어 박태성도 어느 덧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버지의 묘 곁에 묻혔는데, 장례를 모두 치른 후손들이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큰소리로 울더니 박태성의 무덤 앞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사람들은 효자 박태성의 무덤 곁에 호랑이를 묻어주었고 제사도 지내주었다.” 

 

  우리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효(孝)라고 한다. 효는 어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기본 예의에 해당한다.  효경에 “효는 덕의 근본이요, 모든 가르침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다(孝德之本也 敎之所由生也).”고 했다. 효 사상은 동양에서 특히 강조되어 온 것이지만,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도 “부모를 섬길 줄 모르는 사람과는 벗하지 말라. 인생의 첫발을 잘못 들여놓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것 중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이 효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박태성의 효성은 짐승까지도 감복할만한 효성이었다.

 

  전설 속 효자 박태성과 인왕산 호랑이 무덤이 있는 곳은 북한산성 인근 효자동인데, 바로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동네다. 정려비는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30년(1893)에 세운 것이다. 박태성과 그의 부친의 묘는 박태성정려비를 따라 25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볼 수 있다. 그 무덤가에는 호랑이상이 지키고 있다.  효가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박태성의 효성은 참으로 아름답다.이 구간은 둘레길 곳곳에 묻어 있는 이들의 효심을 걸음걸음마다 느끼며 걷는 특별한 길이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밤골이다.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 밤골이라 불렸다. 참나무과인 밤나무는 다산과 부귀의 상징으로 그 쓰임새가 많아 고려와 조선시대에 밤나무 재배를 널리 장려하였다는데, 이곳 밤나무들은 연륜이 꽤 오래된 듯. 울창한 밤나무 골에 밤골공원지킴터가 있고, 국사당이 있다. 국사당은 일종의 굿당이다. 근대화와 함께 민속신앙이 점점 사라지면서 더욱 접하기 힘들어지고 있는 요즈음 색다른 볼거리가 된다. 미신으로 평가되는 무속신앙이지만, 민속 고유의 신앙행위라는 점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구간을 걷고 사기막골에 내려와 늦은 점심을 했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다보니 배고픈 줄 모르고 두 구간을 걸은 셈이다. 시골밥상 송촌(松村,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46-4, 02-354-7657l )의 주메뉴는 토종 청국장, 토종된장이다. 이곳의 청국장은 주인이 직접 방안에다 담요를 덮어놓고 발효시킨 것으로 청국장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숟가락만 떠 먹어보아도 진짜배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맛 나는 배추쌈, 곰삭은 젓갈, 묵무침 한 접시는 입맛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12구간 (충의길) : 나라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걷는 충의길(3.7km, 1시간 45분) 

 

 

  12구간은 사기막골 입구에서 출발하여 사기막전망대와 솔고개를 거쳐 교현우이령길 입구까지의 길을 가리킨다. 충의길의 시작은 사기막 계곡에서 다리를 건너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리 위에 서면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봉우리가 우람하게 솟은 모양을 볼 수 있다. 숲길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출렁다리가 반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1구간부터 11구간까지에는 없었던 다리다. 출렁다리를 지나 오르막 길 언덕에 자리 잡은 사기막 전망대, 이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숨은벽 능선이 보인다. 그 뒤로 웅장한 배경은 바로 백운대다.
  
  여기서 터벅터벅 숲 속 길을 걸노라면 “좋은 산행은 도시에서 파괴된 몸과 마음을 찾아준다”는 팻말을 만나게 된다. 이런 팻말은 호젓한 산책길을 가는 동안 명상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상장봉 왼쪽 사면을 가로지르는 숲 속 길은 새롭게 조성된 산책로로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아름답다. 내리막길에 다시 나타나는 출렁다리를 거듭 지나면 참나무 오르막길이고 등성이에 쉼터가 나타나고, 엔젤농원입구를 지난다. 숲 속 길을 통해 솔고개로 내려오면 예전에 두어 번 와 본적이 있는 섬진강메기집이 눈에 띤다. 새로 생긴 하구언민물장어집도 보이고. 솔고개에서 교현리까지 이어지는 길은 보도를 함께 걷는 구간이다. 시원하게 뚫린 39번 도로와 나란히 걷는 보도에서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보인다.

  도로변으로 나와 자세히 보니 주변에는 군부대가 많다. 지역별 예비군훈련장과 군부대가 많은 것을 보며, 이 길을 ‘충의길’로 명명한 뜻을 비로소 알겠다. 나 역시 재직시절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이곳 인근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군사적으로 이 길은 북쪽에서 서울의 남서쪽으로 진입하는 중요도로라는 점에서 군사적 요충지라 아니할 수 없다.  솔고개에서 교현리까지는 산길이 아니라 도로 옆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 다소 지루함이 느껴지는 구간이지만, 이 길을 걸으면 우리로 하여금 나라사랑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교현우이령길 입구에 다다르면 북한산 둘레길 12구간인 충의길이 끝난다. 여기서 송추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13구간인 송추마을길이고, 우이동 쪽으로 우이령을 넘는 구간은 21구간인 우이령길이다. 이 길은 사전예약제로 운영하는데 북한산둘레길 순환코스를 모두 탐방하고 나서 마지막에 탐방할 계획이다.  
 

 

 

 지난 4일간 1구간에서 12구간까지 걸었으니 돌아보면 절반 이상을 걸은 셈이다. 다음은 13구간인 송추마을길과 14구간인 산너머길을 걸을 차례다. 눈이 내릴지도 모르지만 회원 모두가 무사 완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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