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맛, 이문(里門)설농탕
월간외식경영 글·이정훈 실장 사진·엄태헌 기자
겨울이 되어서야 송백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날이 지고 새면 멀쩡했던 식당이 어느새 사라지고 또 새로운 식당이 생기는 요즘, 꿋꿋이 수십 년 이상을 버텨온 노포들의 모습은 자못 송백의 기상에 가깝다. 예전 화신백화점 뒤, 지금의 종로타워 뒤편에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문(里門)설농탕>은 그래서 더욱 존재감이 부각되어 보인다. 이 집의 개점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02년 설과 1905년 설이 있는가 하면 1907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맞든 100년, 한 세기가 지난 것만큼은 틀림없다.
100년 동안 세 가문에서 맛과 경영 이어와
<이문설농탕>의 첫 주인은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이 가게를 열고 약 50년 정도 운영한 뒤, 양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넘겼다. 이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은 작고한 고 유원석 여사와 그의 아들이자 지금의 대표인 전성근(66) 씨에게 1960년에 가게를 넘기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전 대표의 모친 유 여사는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녀는 부산 피난시절, 이화여전 동기였던 지휘자 정명훈 씨의 어머니 이원숙 씨와 함께 식당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0년 <이문설농탕>을 인수한 뒤에도 가사과 출신으로 나름대로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유 여사였지만 식당에 전해 내려오던 설렁탕 맛을 그대로 배우고 이어나갔다. 당시 손님들에게도 ‘주인은 바뀌었지만 맛은 그대로다’고 인정받았다고. 대학을 나온 여성이 식당주인 노릇을 하는 일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기도 했지만, 전 주인이 지켜온 맛을 인정하고 그 전통을 이어온 것도 보기 드문 일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유원석 여사의 아들 전성근 대표가 경영을 맡고 있다. 전 대표는 건국대 축산과를 졸업하고 원래 전공인 낙농업을 하다가 작고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가게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거동이 불편해 일주일에 한두 번만 식당에 나오고 식당 운영을 황영상(49) 지배인에게 맡겨두고 있다. 황 지배인은 친구였던 권투선수 김광선의 소개로 대학시절 이 집에 처음 온 것이 인연이 되어 몇 십 년 째 <이문설농탕>에서 일하고 있다.
손기정, 이희승 선생 단골집, 한 때 100세 넘은 할아버지 단골도
이 집을 드나들었던 인사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종로와 우미관의 전설, 김두환과 그 측근이었던 김동휘, 유지광의 측근이었던 낙화유수(김태련) 등이 이 집 설렁탕으로 근력을 보충했다. 한국 스포츠계의 영웅, 마라토너 고 손기정 옹도 이집의 단골이었다. 황영상 지배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설렁탕을 주문했던 손옹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과거 근처에 신민당 당사가 가까이 있어서 그 시절 신민당 총재를 지냈던 이민우 씨와 신도환 씨도 이 집을 자주 찾았다. 양주동 선생은 들를 때마다 꼭 술과 함께 설렁탕을 주문하였다. 유원석 여사의 이화여전 은사이기도 했던 이희승 선생도 평소 이 집 단골이었다. 학회 모임이 끝나면 회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뒤풀이를 하곤 했다. 이희승 선생이 만년에 몸이 불편해 오지 못하자, 며느리가 와서 매일 설렁탕을 사다 날랐던 일화도 있다. 이 집의 근처에 YMCA체육관이 있었기 때문에 운동하던 유도 선수들도 자주 들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형주와 김재엽 선수 등이 단골손님중 비교적 젊은 축에 든다.
황영상 지배인의 기억에 남는 단골손님은 과천에 살았던 호근창 옹이다. 호옹은 1886년 생으로 원래 종로에서 금은방을 하셨던 분이다. 젊은 시절부터 거의 평생 동안 금은방 근처였던 <이문설농탕>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자녀들과 함께 과천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 집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100세가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과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와서 설렁탕을 맛나게 드셨다. 호옹은 이 집 종업원들과 옛날 얘기도 나누고 잠시 쉬었다가 돌아가시고는 했다고 한다. 대략 10년 동안을 그렇게 드나드셨는데 잊지 않고 찾아주는 호옹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설렁탕 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설렁탕 한 그릇에 담긴 추억을 찾는 사람들
늦은 오후시간인데도 연세 지긋한 손님들이 식당 안으로 꾸준히 들어왔다. 가끔씩 노부부가 와서 사이좋게 설렁탕을 시킨다. 두 사람이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설렁탕을 맛나게 드는 모습은 타인이 보기에도 좋다. 떨리는 가슴으로 그녀의 입으로 고기국물 들어가는 모습을 흘끗거렸을 젊은이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그녀와 함께 그 자리에서 다시 설렁탕을 먹으며 즐거워한다. 당시로서는 설렁탕 값이 비쌌을 것이다. 예전에는 애인과 함께 설렁탕을 먹는 것도 데이트의 한 형태였다고 한다. 용기를 내어 여자 친구에게 ‘설렁탕 함께 하자’며 불러내어, 설렁탕 데이트를 수줍게 즐겼을 젊은 날의 추억을 국물에 함께 말아 맛있게 나누는 노부부의 모습은 설렁탕 국물보다 더 따뜻해 보였다.
<이문설농탕>은 수육을 만들 때 고기 부위별로 삶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도가니는 4시간, 양지는 1시간 30분, 머리고기는 2시간 30분 등이다. 이 시간을 잘 맞춰야 제대로 된 맛이 나온다. 설렁탕 국물은 90년대 이전만 해도 연탄불에 무쇠솥을 올려 24시간 끓였으나 지금은 가스불에서 18시간 이상을 끓이고 있다. 몇 십 년 만에 연탄불에서 가스불로, 무쇠솥에서 스테인리스 솥으로 바뀌었지만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는 철칙만은 계속 지키고 있다. 그래서 젊은 고객가운데 ‘설렁탕 맛이 싱겁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설렁탕에는 양지와 머리고기는 물론이고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지라와 우설도 넣어준다. 오래된 단골에게는 손님이 좋아하는 부위로만 알아서 넣어주기도 한다. 설렁탕과 함께 먹는 깍두기도 설렁탕의 느끼한 맛을 확실하게 잡아준다. 두툼한 모양처럼 담백하다. 주방장 김영일 씨가 전임 주방장으로부터 배운 깍두기 만드는 법을 지금은 부주방장 김호영 씨가 배워 10년 째 맛을 잇고 있다.
켜켜이 쌓인 음식문화, 사라질 위기 안타까워
현재 <이문설농탕>은 재개발지구에 들어가 있어 언제 헐릴지 모르는 신세다. 셈에 밝은이들은 재개발을 하면 얼마의 돈이 남는지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소중한 문화와 역사와 추억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왜 계산에 넣지 않는지 모르겠다. 황 지배인은 “외국에 이민 가서 살다 가끔씩 식당에 들러 감회에 젖는 노인들이 많은데 이 집이 헐리고 나면 그런 분들이 얼마나 상실감을 느낄지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문(里門)’은 동네 어귀를 뜻하는 말로, 동네의 입구에 있는 수호신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문설농탕>이 그 이름답게 우리 식당문화사를 간직한 이 집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교교시절 모친을 도와 가끔씩 식당일을 해, 단골손님들로부터 ‘이문설농탕집 아이’라고 불리었던 전성근 사장도 이제 어느덧 초로에 접어들었다. 주인집 아이가 노인이 되고 화신백화점이 종로타워로 바뀌는 동안 <이문설농탕>은 오늘도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다. 언제 헐릴지도 모를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45번지 02-733-6526
<출처> 2011. 4. 11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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